레이블이 너무나 아름다워 한 번 보면 잊혀지지 않는 와인. 바로 파 니엔테(Far Niente)다. 2019년 5월 23일과 24일 양일간 파 니엔테의 부사장 부르스 무어스(Bruce Mooers)가 방한했다. 그를 통해 파 니엔테의 뜻과 아름다운 레이블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파 니엔테의 역사와 와인 철학을 이해하고 와인을 시음하니 와인 맛이 한층 생생하게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파 니엔테 샤르도네를 직접 서빙하는 무어스 부사장]
파 니엔테는 1885년 나파 밸리에 설립된 와이너리다. 하지만 1920년 미국의 금주령 선포로 와이너리는 60년간 방치된 채 버려지고 말았다. 파 니엔테를 부활시킨 사람은 길 니켈(Gil Nickel)이었다. 길은 1979년 폐허가 된 와이너리를 인수했다. 골조만 남다시피한 와이너리를 재건하던 중 그는 돌로 된 현판 하나를 발견했다. 현판에 써진 말은 ‘Dolce Far Niente’. 라틴어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니 달콤하다’라는 뜻이다. 길은 운명처럼 이 말을 와이너리 이름으로 정했다.

[아름다운 파 니엔테 와이너리 전경. 조경업을 했던 길 니켈 집안의 실력이 돋보인다.]
와이너리 이름을 정했으니 레이블을 디자인할 차례였다. 길은 예전 레이블을 복원하고자 사방으로 알아봤으나 성과가 없었다. 마케팅팀과 레이블에 대해 회의를 하던 날이었다. 회의는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길의 집에서 진행됐는데, 마침 이 집의 개보수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런데 공사를 하던 인부 한 사람이 다가와 자기가 레이블 디자인을 하겠다고 제안했다. 의외의 제안이었지만 기회를 주기로 하고 디자인을 가져와 볼 것을 허락했다.그런데 그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아름다운 레이블을 가져왔다. 금색 테두리를 감싸고 있는 포도넝쿨과 그 안에 그려진 포도밭, 와이너리, 마야카마스 산맥 등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창적인 것이었다. 그의 이름은 톰 로드리게스(Tom Rodrigues). 단순한 공사장 인부가 아니라 스테인드 글라스 디자이너였다. 파 니엔테라는 와이너리 이름과 레이블은 이렇게 마치 운명처럼 발견되고 그려진 것이었다.

[아름다운 레이블의 파 니엔테 카베르네 소비뇽과 샤르도네.
후면에는 동굴을 파서 만든 파 니엔테 와인 숙성실이 보인다.]
파 니엔테는 샤르도네(Chardaonny)와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단 두 가지 와인만 만든다. 여타 와이너리 처럼 같은 품종으로 만든 와인을 Reserve나 selection같은 단어를 써서 여러 등급으로 구분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길 니켈이 파 니엔테에서 추구하는 와인철학이다. 파 니엔테에서는 나파 밸리 최고의 샤르도네와 카베르네 소비뇽 딱 한 가지씩만 만드는 것이 그의 고집인 것이다. 최고의 와인을 만들기 위해 그는 와이너리를 재건하며 동굴도 팠다. 1880년 이후 나파밸리에서 처음 파는 동굴이었다고 한다. 4만 제곱 피트 크기에 배럴도 3000개나 수용할 수 있는 규모다. 여기에서 숙성되는 와인이 모두 파 니엔테로 병입되는 것도 아니다. 여러 번 배럴 테이스팅을 거친 뒤 품질이 좋은 것만 병입하고 나머지는 가차없이 벌크 와인으로 판매해 버린다. 파 니엔테를 마시는 것은 최고 중에서도 최고를 마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파 니엔테는 나파 밸리에 총400에이커의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다. 여기에서 재배한 포도로 파 니엔테만 만들기에는 뭔가 부족했다. 밭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와인도 만들고 싶어지는 것이 당연지사다. 하지만 길 니켈은 소신을 꺾지 않았다. 그 결과 별도로 설립한 와이너리가 니켈&니켈이다.니켈&니켈에서는 카베르네 소비뇽 100% 와인만 15종을 생산한다. 모두 싱글 빈야드(single vineyard) 와인이다. 니켈&니켈 카베르네 소비뇽이 악기 하나가 연주하는 독주곡이라면, 카베르네 소비뇽에 메를로, 카베르네 프랑, 프티 베르도 등을 소량 블랜드해 만드는 파 니엔테 카베르네 소비뇽은 모든 악기가 한 곡을 연주하는 교향곡이라 할 수 있다.

[니켈& 니켈과 파 니엔테의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들]
파 니엔테와 니켈&니켈 외에도 벨라 유니온(Bella Union)과 앙 루트(En Route)라는 와이너리가 더 있다. 벨라 유니온은 카베르네 소비뇽 100% 와인 한 가지만 생산하는데, 이 와인은 여러 포도밭에서 수확한 카베르네 소비뇽을 블랜드해 만든다. 앙 루트는 2007년 소노마 카운티의 러시안 리버 밸리(Russian River Valley)에 80 에이커의 땅을 구입하며 새롭게 설립한 와이너리다. 이곳에서는 피노 누아(Pinot Noir) 와인만 생산한다.
시음한 와인은 파 니엔테와 니켈&니켈 와인들이었다. 무어스 부사장에 따르면 나파 밸리 와인 스타일은 1997년부터 2001년 사이에 큰 변화를 겪었다고 한다. 이전에는 보르도 스타일을 추구했지만 1990년대 중반 컬트 와인이 등장하면서 나파 밸리 스타일이 정착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파 니엔테는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파 니엔테의 와인들을 맛보면 나파 밸리 스타일이 약간 가미된 보르도 와인 같다는 느낌이 지배적이다.

파 니엔테 샤르도네 2011 & 2017
2011년산은 더블 매그넘, 2017년산은750ml였다. 파 니엔테의 매력은 단연 매끄러운 유질감이다. 그 속에 조화롭게 어우러진 과일향 또한 우아하기 그지없다. 2011년산에서는 레몬, 배, 붉은 사과 등 달콤한 과일향과 함께 열대과일향이 살짝 느껴졌다. 온도가 점점 올라가면서 견과류의 고소함도 드러나기 시작했다. 2017년산은 2011년산에 비해 향미가 섬세하고 정교했으며 산뜻한 신맛이 돋보였다.영 빈티지인만큼 레몬, 사과, 복숭아 등 과일향도 더 신선했다. 무어스 부사장에 따르면 파 니엔테 샤르도네는 상큼함을 살리기 위해 젖산발효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스테인레스 스틸 탱크에서 낮은 온도로 긴 시간 발효되고 나면 프랑스산 오크 배럴(약 60% 새 오크)에서 9~10개월간 숙성시킨다. 그래서인지 오크향이 과하지 않아 섬세함이 잘 살아있었다.

파 니엔테 카베르네 소비뇽 1996, 2002, 2012, 2016
보르도 와인에 비교한다면 샤토 마고를 연상시키는 맛이다. 과일향, 신맛, 보디감의 밸런스가 뛰어나고 모든 향미가 우아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살짝 꽃향도 느껴져서 ‘우아한 장미의 기사’라는 별명을 붙이고 싶을 정도다. 1996년산은 이미 23년이나 숙성된 와인임에도 나이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세련미가 살아 있었다. 과일향은 생동감이 넘치고, 중간 정도의 보디감이 우아함을 배가시켰다. 여운에서는 장미 포푸리 같은 꽃향이 맴돌았다. 2002년산은 좀 더 따뜻한 느낌을 주는 와인이었다.베리향이 달콤했고, 타닌이 더 농밀했다. 보디감 또한 좀더 묵직했다. 1996년산이 우아함의 결정체라면 2002년산은 농밀함의 대표주자 같았다. 2012년산은 향수 같다고 느낄 정도로 꽃향이 도드라지는 스타일이었다.잘 익은 검은 베리류와 신선한 붉은 베리가 적절히 섞인 과일향에 후추 같은 향신료가 살짝 올라왔다. 매끈한 질감과 탄탄한 구조감, 약간 무게감이 느껴지는 보디감 등 카베르네 소비뇽의 모범답안이었다. 2016년산도 매력적이었다. 과하지 않은 과일향, 탄탄한 질감, 장미, 바이올렛 등 꽃향이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다. 영 빈티지여서 신선함이 많았지만 지금 마시기에도 부족함이 없었다. 1996년부터 2016년까지 20년에 걸친 버티컬 테이스팅은 파 니엔테 카베르네 소비뇽의 저력을 보여주기에 손색이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놀라운 것은 96년산의 생동감이었다. 파 니엔테 와인의 숙성잠재력은 과연 얼마나 될까.기회가 된다면 1996년산을 5년 뒤쯤 다시 맛보고 싶다.

니켈& 니켈 CC 랜치 카베르네 소비뇽 2016과 존 C 슐랜저 빈야드 카베르네 소비뇽 2016
CC 랜치는 나파 밸리 북부 러더포드(Rutherford)에 위치한 밭이고, 존 C 슐랜저는 나파 밸리 중부 오크빌(Oakville)에 위치하고 있다. 두 와인이 각기 다른 밭에서 생산된 만큼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CC 랜치는 마른 허브, 흙, 향신료 등의 향미가 돋보였다. 무어스 부사장에 따르면 이것이 러더포드 와인의 특징이며, 나파에서는 이를 두고 ‘Rutherford dust’라고 표현한다고 한다. 반면 존 C 슐랜저는 검게 익은 체리처럼 과일향이 더 진하고 풍부했으며 질감이 부드러웠다.존 C 슐랜저 밭은 오퍼스 원 바로 옆에 위치하는 밭으로, 농밀한 과일향이 특징이다. CC 랜치가 바이올린으로 연주하는 정교하고 세련된 카프리스라면, 존 C 슐랜저는 첼로로 느리게 연주하는 소나타 같다고나 할까. 여건만 허락한다면 니켈&니켈의 싱글 빈야드 카베르네 소비뇽을 모두 놓고 시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나파 밸리 카베르네 소비뇽은 과연 어떤 밭에서 나온 것인지 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

파 니엔테 돌체 2012
이 와인을 만들게 된 계기가 재미있다. 돌체가 생산되기 전 일이다. 사람들을 초청해 와이너리에서 디너를 했는데, 디저트 와인으로 샤토 디켐을 내놓았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돌아가며 모두 디켐이 좋았다는 말만 하더라는 것이다.이에 길 니켈이 미국 최고의 스위트 와인을 만들겠다고 결심, 1989년에 돌체가 첫 선을 보이게 됐다. 돌체는 세미용 90~95%에 소비뇽 블랑 5~10%를 섞어 만든다. 소비뇽 블랑은 적당한 신맛을 내는 정도로 블랜딩 한다.포도 수확은 11월 중순부터 말 경이며, 최소 34브릭스(일반 와인용 포도는 24브릭스)에 도달한 포도만 알알이 따서 만든다고 한다. 당도가 높은만큼 발효에도 시간이 많이 걸려 12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총 6개월이 소요된다. 이후 32개월간 새 프렌치 오크통에서 숙성시킨 뒤 출시한다. 맛을 보니 꿀, 복숭아, 살구, 구아바 등 달콤함이 아름답게 피어올랐다. 이 와인이 좀 더 나이를 먹으면 얼마나 더 근사한 맛이 날지 궁금했다. 아마도 구수한 견과향과 마른 과일향이 더해지며 복합미가 한층 더하지 않을까.상큼하고 깔끔한 여운이 세련미를 더했다. 돌체는 모든 시음을 화려하게 마무리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와인은 눈, 코, 입으로 즐기는 술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눈으로는 색을 잠시 감상할 뿐 대부분의 즐거움은 코와 입의 몫이다. 파 니엔테는 그 비율을 깨는 와인이다. 아름다운 레이블을 감상하며 맛있는 와인을 즐기노라면 하염없이 낭만에 사로잡힌다. 마시는 이로 하여금 바로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하기 위해 길 니켈은 파 니엔테에서 최고의 품질을 보여주는 샤르도네, 카베르네 소비뇽을 단 하나씩만 만든 것이 아닐까. 니켈&니켈에서 포도밭 한 곳의 개성을 오롯이 보여주는 카베르네 소비뇽을 만드는 것도 그런 연유일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파 니엔테만 즐기니 인생이 달콤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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