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의 90%가 유기농이라는 말을 듣는다면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아마도 수치가 잘못 됐거나 마케팅을 위해 소위 '뻥'을 친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스페인의 후미야 지방은 실제로 와인 생산의 90%가 유기농이다. 심지어 80%는 인증을 받은 유기농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걸까?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면 후미야의 자연환경부터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후미야의 테루아에는 과연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을까?
후미야는 스페인의 항구도시 발렌시아(Valencia)로부터 남서쪽 방향 내륙으로 약 16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지중해로부터 겨우 100km 떨어져 있으니 그 정도면 온난한 지중해성 기후를 띠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후미야의 날씨는 대륙성이다. 한여름엔 낮 최고 기온이 40℃에 육박하고 겨울엔 영하로 떨어지는 날이 허다하다. 믿기 힘든 반전이다.

[후미야의 지도 - 삼각형으로 표시된 것이 모두 산일 정도로 후미야는 산악지대다]
고지대에 위치한 후미야
스페인의 전체 지형을 보면 국토 한가운데에는 메세타 고원이 자리하고 칸타브리아, 과다라마, 그레도스, 시에라 네바다 등 거대한 산맥들이 동서로 국토를 가로지른다. 대서양이든 지중해든 해안에서 조금만 내륙으로 들어가도 고도가 급격히 높아지는 형세다. 후미야도 예외는 아니어서 해안에서 카스티야-라 만차(Castilla-La Mancha) 고원으로 향하는 산악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해발 고도가 400~800m에 이르고 포도밭이 산과 산 사이의 넓은 계곡과 고지대에 자리하고 있다. 위치가 이러하니 대륙성 기후의 특징을 많이 갖는 것이 당연하다. 포도가 한참 성장하는 6~8월에는 한낮의 최고 기온이 30~40℃까지 오르는데 반해 최저 기온은 15~20℃까지 떨어진다. 일교차가 무려 15~20℃나 된다. 큰 일교차는 포도 품질 향상에 상당한 도움을 준다. 한낮의 열기가 포도의 당도를 높이고 서늘한 밤은 포도의 산도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당도와 산도의 균형이 완벽한 포도가 생산되는 것이다.
극도로 건조한 기후
하지만 일교차가 크다고 해서 포도를 유기농으로 생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유기농으로 포도를 재배하려면 제초제나 농약 같은 화학 물질을 살포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후미야의 환경이 포도나무에 치명적인 질병을 억제하는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포도에게 가장 무서운 질병은 무엇일까? 바로 곰팡이다. 백분병(powdery mildew)과 노균병(downy mildew)은 포도를 괴롭히는 대표적인 진균성 질병으로 꼽힌다. 그런데 곰팡이가 자라는데 필수적인 것이 무엇인가? 바로 습기다. 후미야가 천혜의 유기농 포도재배지인 것은 습기가 극도로 적기 때문이다. 이곳의 강수량은 연간 300mm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한여름 폭우로 하룻밤에 150mm의 강수량을 기록하기도 하는데, 1년 내내 내리는 비가 300mm라니 상상이 안되는 수준이다. 참고로 양조용 포도 재배에 가장 이상적인 강수량은 연 600~800mm다. 연 300mm라면 그에 턱없이 모자라는 수치이니 곰팡이의 생존은 커녕 포도의 생존도 어려울 지경이다.
습기를 몰아내는 바람
후미야를 건조하게 만드는 데에는 바람도 한몫 한다. 후미야에는 지중해에서 시작된 레반트(Levant)라는 동풍이 끊임없이 불어온다. 레반트는 원래 습기를 머금은 서늘한 바람이지만 육지를 거쳐 후미야에 닿을 때면 덥고 건조한 바람으로 바뀐다. 비가 많이 오는 곳도 바람이 자주 불면 습기가 없어지는데, 강수량이 적은 곳에 덥고 건조한 바람이 지속적으로 불어주니 후미야는 곰팡이 제거를 위한 화학제품의 사용이 전혀 필요치 않은 천혜의 유기농 환경인 것이다.

[지표면에 돌이 가득한 후미야의 포도밭 (사진 제공: 보데가스 BSI)]
모나스트렐과 토양의 환상적인 궁합
그런데 이쯤에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포도 재배에 필요한 강수량에도 턱없이 못 미칠 정도로 비가 안 오고 바람마저 불어 극도로 건조한데 포도는 어떻게 자라는 걸까? 해답은 품종과 토양에 있다. 후미야를 대표하는 품종은 모나스트렐이다. 이 품종의 가장 큰 장점이 더위에 강하고 물을 많이 필요치 않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모나스트렐도 포도다. 물을 전혀 먹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다. 그런데 후미야의 포도밭엔 돌이 가득하다. 석회질 돌 아래에 모래가 섞인 양토가 자리하고 있는데, 돌은 땅 속 습기가 증발하는 것을 막아주고 물빠짐이 좋은 모래 토양은 수분이 지표면에 머물지 않고 지하 깊숙이 들어가도록 돕는다. 건조한 환경은 곰팡이의 증식을 막고, 포도나무는 지하수를 찾아 뿌리를 깊숙이 내리며, 깊은 뿌리는 테루아의 진솔한 맛을 품은 포도를 생산케 하니 후미야는 그야말로 유기농의 삼박자가 완벽하게 완성된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후미야의 포도 농가와 와이너리에게 유기농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니다. 그들에게 유기농은 그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일 뿐이다.
후미야의 주목할 만한 유기농 와이너리들
후미야에서는 유기농을 채택하지 않는 와이너리를 찾는 것이 더 빠를 정도로 지역 전체가 유기농을 채택하고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대표격이라 할 만한 12개 와이너리들이 어떻게 유기농 와인을 생산하고 있는지 간략히 알아 보자.
보데가스 블레다(Bodegas Bleda)는 1915년에 설립된 가족경영 와이너리다. 해발 고도 650미터에 위치한 발레 데 옴블랑카스(Valle de Omblancas) 지역에 250 헥타르의 포도밭을 보유하고 있으며 모두 유기농으로 경작하고 있다. 모나스트렐 외에도 다양한 품종을 재배하고 있으며, 단일 품종과 블렌드 와인으로 후미야의 다채로운 와인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보데가스 블레다의 까스틸로 데 후미야 오가닉(Castillo de Jumilla Organico) 와인은 모나스트렐 100%로 만든 유기농 와인으로 IWSC, 베를린 와인 트로피, 아시아 와인 트로피 등에서 여러 차례 수상하며 품질을 인정받은 바 있다.
보데가스 BSI는 1934년에 수백 가구의 포도 농가가 연합해 설립한 협동조합 와이너리다. 전 세계에서 필록세라 이전에 식재된 모나스트렐 고목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고, 후미야 최고의 모나스트렐 와인을 생산하는 곳으로 인정받고 있다. 총 1400헥타르의 밭에 식재된 포도나무의 평균 수령은 35년이며 밭의 대부분이 유기농으로 경작되고 있다. 이들의 와인은 수확량을 극도로 제한한 포도로 만들어 풍미의 집중도가 탁월하고 구조감이 탄탄하다. ISO-9001 품질 인증, ISO-14001 환경 인증, IFS와 BRC 식품 안전 인증과 함께 유기농 인증을 보유하고 있다. BSI의 와인들은 콩쿠르 몽디알 드 브뤼셀, 베를린 와인 트로피, 문두스 비니 , IWC, 디캔터, IWSC 등에서 여러 차례 수상한 바 있다.
보데가스 카르첼로(Bodegas Carchelo)는 1990년에 설립된 와이너리다. 이들은 포도를 유기농으로 재배할 뿐만 아니라 와이너리를 지속가능하게 운영하는 데에도 힘쓰고 있으며, 청소년의 문화와 건강 증진을 위해 비영리 단체도 후원하고 있다. 수확한 포도의 절반 정도만 사용할 정도로 와인의 품질 관리에도 매우 철저하다. 카르첼로 와인의 대부분은 유기농이며 비건이지만, 그중에서도 카르첼로 C 는 6개월간 프랑스산 오크에서 짧게 숙성을 거친 뒤 출시해 신선한 과일향이 매력적이다.
에센시아 와인즈(Esencia Wines)는 유기농 와인 생산의 선두주자인 카사 데 라 에르미타(Casa de la Ermita)와 현대적인 와인 양조를 시행하는 하시엔다 델 카르체(Hacienda del Carche)라는 두 와이너리의 결합으로 탄생했다. 둘의 결합으로 에센시아 와인즈는 우수한 품질에 지속성을 더한 결과를 낳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세파스 비에하스(Cepas Viejas)는 이들이 보유한 모나스트렐 가운데 나이가 가장 많은 고목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든 와인으로 진한 풍미와 미네랄 터치가 일품이다.
보데가스 루손(Bodegas Luzon)은 1841년에 설립된 후미야에서 가장 오래된 와이너리 중 하나다. 설립자인 돈 호세 데 몰리나는 군 사령관으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필리핀 루손섬에 오래 주둔한 적이 있어 그것을 인연으로 와이너리 이름을 루손이라 지었다. 보데가스 루손은 '기후 보호 와이너리' 인증을 받았으며 총 500헥타르의 포도밭 중 절반이 공인된 유기농 산지다. 이들의 와인 중 알마 데 루손(Alma de Luzon)은 물을 주지 않고 재배한 모나스트렐 80%와 시라 20%를 손수확한 뒤 야생 효모로 발효해 만들었다.
보데가스 올리바레스(Bodegas Olivares)는 1930년에 설립된 가족경영 와이너리다. 해발 825미터 고지대에 위치한 포도밭은 석회질이 많은 모래 토양이며 강수량이 극히 적어 자연스레 유기농으로 경작되어 왔다. 이곳에는 1872년에 식재된 모나스트렐 고목이 있고, 대부분의 포도나무들이 미국산 뿌리에 접붙이지 않은 자신의 뿌리로 서있다. 가족용으로 만들던 모나스트렐 스위트 와인을 1998년 시장에 내놓으면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2000년에는 알토스 데 라 호야(Altos de la Hoya)를 출시하며 드라이한 스타일로도 큰 호응을 얻었다. 알토스 데 라 호야는 이들의 시그니처 와인으로 가장 좋은 포도를 골라 만들었으며 야생 효모로 발효했다.

[키작은 고목에서 포도를 일일이 손수확하는 모습 (사진 제공: 보데가스 올리바레스)]
보데가스 산 디오니시오(Bodegas San Dionisio)는 1957년 후미야 안의 푸엔테알라모(Fuentealamo) 지역 포도 농가들이 설립한 협동조합 와이너리다. 산 디오니시오라는 이름은 푸엔테알라모를 지켜주는 성인의 이름이다. 이들은 환경 친화적인 고품질 와인을 목표로 하며, 자신의 뿌리로 서있는 모나스트렐 고목과 함께 시라, 프티 베르도, 베르데호 등을 재배해 전통과 장인 정신이 녹아든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이들이 만든 모나스트렐 와인은 아시아와인트로피, 디캔터, Mundus Vini 등에서 수차례 수상하며 품질을 인정받은 바 있다.
보데가 시에라 노르테(Bodega Sierra Norte)는 3대째 내려오는 가족경영 와이너리다. 이들은 토양 속 미생물을 보호하기 위해 밭갈이를 최소화하고, 포도나무가 스스로 저항력을 높일 수 있도록 하며, 풍미의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포도나무당 수확량을 제한하고 있다. 그 결과물 중 하나인 이퀼리브리오9(Equilibrio 9)을 맛보면 건강한 자연에서 자란 모나스트렐의 깊고 풍부한 아로마와 은은한 향신료 향의 조화가 긴 여운과 함께 진한 인상을 남긴다.
보데가스 비냐 엘레나(Bodegas Vina Elena)는 1948년에 설립된 가족경영 와이너리로 지금은 3대손인 엘레나 파체코(Elena Pacheco)가 운영하고 있다. 포도밭은 총 17헥타르이며 모두 유기농으로 경작되고 있다. 이들이 생산한 파체코 모나스트렐 오르가닉은 야생 효모로 발효하고 오크 숙성을 거치지 않아 유기농 포도의 순수한 맛을 잘 보여준다. 브루마(Bruma) 시리즈는 후미야의 각기 다른 토양에서 자란 모나스트렐로 만든 와인들이며, 에스탄시아 드 실렌씨오 모나스트렐 오가닉처럼 가성비 좋은 와인도 추천할 만하다.
보데가스 이 비녜도스 아센시오 까르셀렌(Bodegas y Vinedos Asensio Carcelen)은 19세기 말에 설립된 와이너리다. 총 300헥타르의 밭이 모두 유기농으로 운영되며 포도나무도 물을 주지 않고 드라이 파밍으로 재배하고 있다. 2006년에는 포도의 신선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포도밭 가까운 곳에 최첨단 기술과 환경 친화적인 공법이 완비된 와이너리를 새로 지었고, 2011년에는 유기농 와인 생산에 필요한 모든 인증을 획득했다. 이들이 생산하는 100x100 모나스트렐 2014년산은 디캔터가 우수 내추럴 와인으로 선정한 바 있다.
에고 보데가스(Ego Bodegas)는 2011년에 설립된 신생 와이너리로 품질, 이미지, 가격이라는 세 가지 요소의 균형을 목표로 한다. 기존의 와이너리를 매입하지 않고 와이너리를 새로 지으면서 시작한 이들은 교과서나 업계의 트렌드를 맹종하지 않고 자신만의 와인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확고하다. 설립 2년만에 30개가 넘는 국가에 와인을 수출할 정도로 빠른 성공을 거뒀으며, 엘 고루 오르가닉 와인은 Int. Wine Awards와 Mundus Vini Biofach 등에서 여러 차례 수상한 바 있다.
핀카 바카라(Finca Bacara)는 후미야의 역사와 기후, 토양 등을 모나스트렐 고목과 와인으로 표현하고자 2016년 탄생한 프로젝트 와이너리다. 밭의 경작은 물론 와인 양조 시에도 인공적인 개입을 최소화함으로써 자연의 순수한 맛이 담긴 와인을 생산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다. 해발 고도 900미터에서 모나스트렐을 주품종으로 재배하고 있으며, 와인은 비건 100%와 글루텐 프리(Gluten-Free)로 생산한다. 이들의 와인 가운데 하이(Hi)는 평소에는 레이블이 검은 색이지만 열이나 빛에 노출되면 적힌 내용이 드러나는 재미난 컨셉의 와인이다. 유기농 모나스트렐 와인으로 진한 풍미가 인상적이며 숙성된 치즈나 육류와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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