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13일, 나라셀라의 와인 복합문화공간 도운에 위치한 레스토랑 코리(Korii)에서 갓 출시된 할란(Harlan) 2019 와 할란 2018 빈티지의 시음회가 있었다. 할란은 와인 애호가라면 누구나 꼭 한 번은 마셔 보고 싶어 하는 명품 와인이다. 명성이 대단한 만큼 가격도 비싸서 기자도 금번 시음회를 통해 한 모금 마셔본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았다. 그런데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났다. 적금을 깨서라도 한 병 사두고 싶은 유혹이 강하게 밀려온 것이다. 이런 경험은 와인 기자 생활에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할란을 영접했던 그날의 일을 재구성해 본다.
[다소곳이 기자를 맞이한 할란 2018과 2019]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오던 저녁 바짓단을 흥건히 적셔 가며 코리에 도착했다. 시음회는 나라셀라 김가영 과장의 할란에 대한 소개로 시작됐다. 할란 에스테이트의 설립자인 윌리엄 할란(William Harlan)은 부동산업으로 성공한 사업가였다. 그에게 와인을 '전도'한 이는 몬다비 와이너리의 설립자인 로버트 몬다비. 그와 함께 보르도와 부르고뉴를 방문한 윌리엄 할란은 '나파 밸리에서 보르도 1등급에 맞먹는 와인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품게 됐다.
이후 윌리엄 할란은 포도밭을 일굴 땅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가 선택한 곳은 나파 밸리 한중간에 위치한 오크빌(Oakville)의 서쪽 산기슭. 프랑스의 우수한 포도밭이 주로 고도가 높고 물빠짐이 좋은 경사지에 자리한다는 사실을 파악한 그는 해발 70~370m 사이의 최적지에 1㎢의 부지를 매입했다.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할란이 보여주는 우아한 풍미가 바로 이 높은 고도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밭에 보르도 품종을 심었는데, 카베르네 소비뇽이 70%, 메를로가 20%, 카베르네 프랑이 8%, 프티 베르도가 2%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 비율대로 와인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빈티지마다의 블렌딩 비율은 대외비로 공개하지 않는다.
할란의 첫 빈티지는 1987년에 나왔지만 출시되지 않았다. 품질이 만족스럽지 않아서였다. 1988과 1989 빈티지 또한 시장에 내놓지 않았다. 평생을 와인에 바친 와인메이커도 실행하기 힘든 고집이다. 1990 빈티지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할란은 세상에 선을 보였고, 이때부터 매년 신화를 써내려 갔다. 할란은 포도 재배, 수확, 양조 등 모든 과정을 직접 시행한다. 오직 품질만이 목표이기 때문에 연간 생산량도 2만 병에 그친다. 할란의 특징은 겹겹이 피어나는 아로마의 레이어. 화려하고 풍성한 와인일수록 음식과의 페어링이 쉽지 않다. 레스토랑 코리가 국내산 제철 식재료로 준비한 음식들과 어떤 마리아주를 보여줄 지에도 관심이 컸다.
[앙리오 2006과 페어링된 코리의 음식들]
웰컴 드링크는 샴페인 앙리오(Henriot) 2006 빈티지였다. 할란을 제대로 맛보기 위해 샴페인은 조금만 마시겠다는 각오는 한 모금에 바로 무너져 내렸다. 잘 익은 사과, 복숭아, 리치, 멜론 등 신선한 과일향과 꿀, 헤이즐넛, 호두, 흰 후추 등 복합미가 어우러진 맛이 너무나 훌륭해 거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함께 즐긴 애피타이저도 요리마다 앙리오의 다채로운 풍미를 부각시켰다. 진도산 김으로 만든 와플과 지리산 캐비아는 앙리오의 미네랄리티를, 백합 조개와 당근 소스 그리고 참나물 퓌레는 앙리오의 크리미한 질감을, 우엉 파우더 쿠키와 겨자씨 요리는 앙리오의 구수한 견과향을, 트러플과 버섯 폼을 얹은 민어 요리는 앙리오의 과일향을 한껏 끌어올렸고, 장미 소스를 가미한 전복과 말린 토마토의 달콤함은 앙리오의 산뜻한 산미가 깔끔하게 정리해 주었다. 애피타이저만 다섯 가지를 먹은 터라 벌써 배가 불러오기 시작해 할란의 품질이 웬만큼 좋지 않고서는 맛있게 느껴지지 않을 것 같다는 걱정을 했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할란 2019와 페어링된 코리의 음식들]
드디어 할란 2019 빈티지가 서빙이 됐다. 3시간 전에 오픈해 디캔팅 해둔 상태였다. 참고로 할란에서는 마시기 한 시간 전 디캔팅을 권한다고 한다. 한 모금 맛본 할란 2019는 모든 예상을 단숨에 뛰어넘어 버렸다. 잠시 충격에 빠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나도 모르게 와인 맛에 오감이 집중됐다. 검은 자두, 블랙체리, 블랙커런트 등 잘 익은 검은 과일향이 우아하게 피어오르고, 붉은 피망 또는 고운 고춧가루를 연상시키는 매콤함과 월계수와 민트 등의 허브 풍미는 은은한 코코아 향과 함께 와인 속에서 세련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바디감은 약간의 살집이 느껴지는 정도일 뿐 무겁지 않았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입안의 세포를 전혀 자극하지 않는 질감의 매끈함이었다. 어린 와인이 어떻게 이런 질감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풍미, 바디감, 타닌, 과일향, 산미 등 모든 요소의 완전무결한 어울림이 믿기 힘들 정도였다.
태어나자마자 너무나 예쁜 아기? 천재적인 실력을 발휘하는 신동? 어떤 표현도 할란 2019를 완전하게 묘사할 수 없을 것만 같다. 대게 어린 와인을 맛보면 튀는 요소가 한두 가지 발견되고 숙성을 거치며 그런 요소들이 어떻게 익어갈지 예측하게 되는데, 할란 2019는 어느 것 하나 튀지 않는 완벽함 그 자체였다. 로버트 파커와 제임스 서클링이 이 와인에 100점을 준 것에 200% 동감한다.
할란 2019와 첫 번째로 페어링한 요리는 버터를 발라 구운 돌문어 요리와 사바용 소스였다. 레드 와인에 해산물은 의외의 조합이지만 문어의 매끈한 질감과 담백함이 와인의 풍미를 살려주었고 사바용 소스의 훈연 풍미가 오크 풍미와 어울리며 와인의 화려함이 입안에서 꽃을 피우는 느낌이었다. 이어서 서빙된 돼지고기와의 페어링에서는 할란 2019의 또 다른 매력이 느껴졌다. 한국의 이베리코라고 불리는 YBD 얼룩 돼지로 만든 요리였는데, 고기의 육질을 와인의 질감이 매끈하게 감싸고 고기에 와인의 과즙이 더해져 음식의 풍미가 한층 풍부해졌으며 요리의 훈연 향과 와인의 향신료 풍미가 환상적인 궁합을 보여주었다.
[할란 2018과 페어링된 코리의 음식]
롤리팝처럼 만든 셔벗로 입안을 개운하게 정리하고 이어 할란 2018을 시음했다. 이 와인은 어떤 맛을 보여줄까? 2018은 바디감이 더 묵직했다. 검은 과일 향의 농밀함은 여전했지만 정향과 민트 같은 향신료 풍미가 보다 진했고 매끈한 질감 속에서 단단하게 느껴지는 구조감이 탄탄한 근육질을 연상시켰다. 할란 2019가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에 등장하는 여신들 같다면 2018은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다비드 같은 느낌이었다. 섬세하고 정교한 스타일을 선호한다면 2019를, 농밀함과 파워를 선호다면 2018을 더 좋아할 듯하다. 2018은 제임스 서클링으로부터 100점, <와인 스펙테이터>로부터 99점을 받았지만 로버트 파커는 97~100점이라는 애매한 평가를 했다. 왜 그랬을까? 지금은 단단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와인이 더 둥글어지며 100점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 아니었을까?
할란 2018과 페어링된 음식도 두 가지였다. 먼저 서빙된 다진 메추리 고기는 메추리 특유의 단단한 질감 위에서 와인의 진한 풍미가 춤을 추는 듯했고 메추리의 독특한 풍미가 와인의 향신료와 환상적인 조합을 이뤘다. 이어서 서빙된 요리는 채끝 스테이크와 솥밥 그리고 각종 뿌리채소와 허브를 발효한 피클이었다. 채끝의 풍부한 육즙과 와인의 감미로운 과일향이 완벽한 조화를 보여주었고, 누룽지 튀김과 초당 옥수수를 곁들인 솥밥과도 기대 이상의 마리아주가 펼쳐졌다. 할란 2018이 상당히 진하고 묵직함에도 불구하고 피클, 밥, 고기 등 모든 요리와 맛있게 어울린다는 점이 놀라웠다. 할란이 워낙 뛰어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와인의 특성을 완벽하게 이해한 레스토랑 코리의 노력과 실력이 만들어낸 결과가 아닐까 싶다.
어느 시음회보다 완벽했던 와인과 음식 페어링을 디저트로 마무리하며 할란 2018과 2019를 잠시 되짚어 보았다. 2018이 숙성잠재력이 기대되는 훌륭한 컬트 와인이라면, 2019는 넘치는 것도 빠지는 것도 없이 모든 요소가 완전무결하게 어우러진 완벽한 와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할란 2019를 꼭 한 병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격을 물어보니 권장 소비자 가격이 2018은 380만 원, 2019는 450만 원이란다. 평소라면 넘사벽이라고 바로 포기했을 텐데 나도 모르게 적금 잔고를 계산했다. 물론 그 자리에서 구입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취재를 마치고 수일이 지나 이 기사를 쓰는 지금도 여전히 마음이 흔들리는 중이다. 좋은 와인을 만나면 머릿속에 테이스팅 노트가 새겨진다. 몇 년이 지나도 그 맛을 잊지 않고 생생하게 기억한다. 기자에겐 그런 와인이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데 할란 2019가 그중 하나가 됐다. 본의 아니게 이번 기사는 주관적인 느낌이 많이 반영됐지만, 뜻깊은 날을 위해 컬트 와인을 구입할 계획이 있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시음 노트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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