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뉴 베르데와 처음 만났던 날이 기억난다. 화이트 와인 한 잔이 간절하던 어느 날, 숍에서 추천을 받아 구입했던 와인이다. 추천한 직원은 이 와인을 냉장고에 보관해도 좋다고 했다. 와인을 오픈하고 잔에 따랐는데 약간의 기포가 올라왔고 색이 아주 맑았다. 목이 마른 상태에서 쭉 들이켰는데, 와인이 왜 이렇게 술술 들어가지? 금세 한 잔을 다 비웠다. 병 레이블을 보니 알코올 도수는 10도였다. 오래전 일이라 자세한 맛은 기억나지 않지만 계속 마시다 보니 어느새 혼자서 한 병을 다 비웠고, 지금까지 가장 빨리 한 병을 비운 와인이라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이후 와인을 공부하면서 이 와인은 포르투갈 비뉴 베르데(Vinho Verde) 지역에서 생산된 와인이고, '비뉴 베르데'는 포르투갈어로 '녹색 와인(green wine)'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국내에서 여전히 이 와인을 생소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가끔 매장을 둘러보다가 비뉴 베르데가 있으면 반가운 마음으로 한 병씩 구입하곤 하지만(가격도 항상 착하다), 이 매력적인 와인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에 항상 아쉬운 마음이 들곤 했다.
최근 세계적으로 비뉴 베르데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EU에서 비뉴 베르데 지역에 크게 투자해 품질 또한 크게 향상되었다. 이제는 국내에서도 보다 많은 사람들이 비뉴 베르데 와인을 함께 즐기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지역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일단 녹색 와인이라니, 이름에는 어떤 뜻이 숨어 있을까?
비뉴 베르데는 '녹색 와인'이 아니다
비뉴 베르데는 포르투갈 가장 북쪽에 위치한 와인 지역(DOC)의 이름이다.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 또한 보통 비뉴 베르데라고 부르는데, 왜 '녹색 와인'이라는 별명이 붙었는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먼저 전통적으로 포도 수확 후 3~6개월 후에 병입한 뒤 빠르게 마시는 와인이라 신선하다는 느낌으로 '녹색'이라는 단어를 선택했을 수 있다. 영어로는 종종 'young wine'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지역은 대서양의 영향으로 수풀이 우거진 곳이다. 파릇파릇한 녹색 풍경 때문에 '그린'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수도 있다. 건조하기로 유명한 포르투갈 남부와 전혀 다른 기후와 풍경을 보이는 곳이다. 또한 와인에서 느껴지는 상큼한 산도가 청사과나 라임 같은 과일을 연상시킬 수도 있다. 이런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비뉴 베르데 와인을 마셨을 때 느끼는 신선함과 밝음, 젊음(youthfulness)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지 않았을까 싶다.

[비뉴 베르데 포도밭의 모습. 초목이 우거진 푸릇함을 자랑한다 (출처: winesofportugal.com)]
비뉴 베르데는 매우 오랜 역사를 지닌 와인 산지다
비뉴 베르데 지역은 알고 보면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와인 산지 중 하나다. 기원전 로마시대 철학자 세네카(Seneca)와 플라이니(pliny)가 이미 이 지역의 와인을 언급한 기록이 남아있다. 포르투갈 와인 중에서는 포트 와인이 가장 유명하지만 사실 비뉴 베르데는 포르투갈에서 가장 먼저 수출한 와인이다. 12세기에 이미 영국, 독일 등에 수출됐고, 16세기부터는 북유럽에 염장한 대구(bacalhau)와 가구 등과 함께 와인이 정기적으로 수출되었다. 1908년에는 이미 비뉴 베르데의 역사와 품질을 인정받아 포르투갈의 공식적인 와인 지역으로 지정됐다.
비뉴 베르데는 상큼 발랄한 맛이다
비뉴 베르데는 북쪽으로는 스페인과 국경을 이루는 미뉴(Minho)강과 남쪽으로는 포트와인으로 유명한 포르투(Porto)가 위치한 도우루(Douro)강 사이에 있다. 포르투갈 와인 산지 중 가장 넓은 지역인데, 언덕도 많고 대서양의 영향으로 상대적으로 서늘하며 강수량도 많다. 따라서 화이트 품종이 더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으로 비뉴 베르데 전체 와인 중 86%가 화이트 와인이다. 비뉴 베르데에서는 전통적으로 토착 품종만 사용해 산도가 높고 알코올이 낮은 와인을 생산한다. 품종에 따라 8.5도에서 11도 정도의 알코올 도수가 일반적이며, 이 지역의 특성인 매력적인 미네랄리티가 느껴지는 와인들이 많다.
비뉴 베르데 와인에는 왜 기포가 있을까?
많은 비뉴 베르데 와인은 잔에 따르면 기포가 뽀글거린다. 원래는 신선한 와인을 만들기 위해 빠르게 병입하다 보니 종종 발효가 끝나지 않은 상태로 담겨 병 안에서 이산화탄소가 생기곤 했다. 물론 지금은 발효를 마치지 않은 와인을 병입하는 경우는 없지만, 소비자들은 오랫동안 비뉴 베르데를 기포가 있는 와인이라 여기곤 했다. 탄산음료의 기포가 입안을 상쾌하게 만드는 것처럼 사실 비뉴 베르데의 기포는 자연스러운 산도와 함께 와인을 더욱 신선하게 만들어주는 장점도 있다. 그래서 현대 와인메이커들은 일부러 병에 이산화탄소를 넣어 기포를 만들기도 한다. 물론 1기압도 안되는 아주 약한 기포여서 스파클링 와인이라고 부르지는 않지만 분명 입안을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비뉴 베르데에서는 레드 와인도 생산한다
비뉴 베르데에서는 화이트 와인을 주로 생산하지만 다양한 미세 기후 덕분에 세부 지역에 따라 개성 있는 레드 와인도 생산된다. 특히 이 지역의 전통 음식들과 조화가 좋은데, 실제로 비뉴 베르데에서는 화이트 와인은 수출용으로 생산하고 집에서는 음식과 함께 레드 와인을 즐겨 마신다는 이야기가 있다. 생산량이 적고 국내 소비량이 많아 포르투갈 외 다른 나라에서 비뉴 베르데의 레드 와인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지만, 기회가 된다면 꼭 한번 접해봐야 하는 레어템이다.
또한 핑크 빛의 로제 와인도 생산되는데, 레드 프룻이 연상되는 향긋한 아로마가 특징이며 신선할 때 음식과 함께 즐기기 좋다. 스파클링 와인은 기포가 더욱 강해진 비뉴 베르데 화이트 와인이라고 생각하면 좋다. 신선한 산미와 과실향 가득한 비뉴 베르데의 특성을 그대로 담고 있다.

[대서양으로 흐르는 강 덕분에 다양한 미세기후가 만들어진다 (출처:www.vinhoverde.pt/)]
비뉴 베르데의 품종, 이것만 기억하자
가장 먼저 알아야 하는 품종은 알바리뇨(Alvarinho)다. 스페인 리아스 바이사스 지역의 대표 품종인 알바리뇨(Albariño)와 같은 품종이다. 사실 스페인 갈라시아 지역과 비뉴 베르데 지역은 해안가를 따라 연결돼 있다. 이 품종은 트로피컬 향에 더해 복숭아, 오렌지, 레몬 등 진하고 복합적인 아로마로 유명하며 이 지역 고유의 매력적인 미네랄 캐릭터가 있다. 산도와 알코올도 상대적으로 높다. 특히 숙성 잠재력이 높아 와인메이커에 따라 꽤 진지한 와인을 만들기도 한다.
다음으로는 포르투갈의 리슬링이라 불리는 로우레이루(Loureiro)가 있다. 역시 훌륭한 산도가 있는 품종이지만 알바리뇨에 비해 더욱 강한 꽃향기가 특징이다. 몇몇 생산자들은 이 품종으로 말 그대로 '쇼킹'한 와인을 만들어낸다.
알바리뇨와 로우레이루는 단일 품종 와인으로도 생산하지만 비뉴 베르데의 대부분 화이트 와인은 여러 품종을 함께 블렌딩한다.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화이트 품종인 아린토(Arinto) 역시 비뉴 베르데 지역에서 볼 수 있고, 트라자두라(Trajadura)도 알바리뇨와 자주 블렌딩한다. 아베수(Avesso)도 알바리뇨와 비슷한 캐릭터이며, 레몬처럼 시트러스 풍미가 강한 품종으로 아잘(Azal)도 있다.
레드 품종은 3가지 정도만 기억하면 된다. 모두 포르투갈 토착 품종들이다. 비냐웅(Vinhão)이 가장 대표적이며 이 지역 사람들이 음식과 함께 즐기는 품종이다. 스파이시하고 흡사 신선한 말벡 같은 느낌도 난다. 에스파데이루(Espadeiro)는 신선하고 과실 풍미가 좋아 로제 와인으로 만들기 좋은 품종이다. 파데이루(Padeiro)는 한때 멸종 위기에서 살아남은 품종으로 포도 사탕 같은 달콤한 아로마를 자랑한다.
비뉴 베르데에는 9개의 세부 산지가 있다
미세기후가 있는 비뉴 베르데는 세부적으로 9개의 산지로 구분한다. 대부분 화강암 토양이며 크게 3개 그룹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몽사웅(Monção) & 멜가소(Melgaço)는 스페인과 이웃한 내륙 지역으로 풀바디의 아름다운 알바리뇨 와인이 생산되는 곳이다. 상대적으로 비가 적고 여름 온도가 다른 지역보다 훨씬 높아 신선하면서도 복잡성이 뛰어난 와인이 생산된다.
리마(Lima), 카바두(Cávado), 아비(Ave)는 비뉴 베르데의 중간 지역으로 해안가와 가장 가깝다. 비가 많이 내려 주로 화이트 와인을 만든다. 루레이루가 이 지역의 대표 품종으로 아린투, 트라자두라 품종으로도 신선하며 향긋한 화이트 와인을 만든다.
바스투(Basto), 소자(Sousa), 파이바(Paiva), 아마랜치(Amarante), 바이앙(Baião)은 비뉴 베르데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하며 도우루 밸리와 이어지는 산이 많은 지역이다. 햇볕을 가장 잘 받기 때문에 쉽게 익기 힘든 화이트 품종(아잘, 아베소)과 함께 여러 레드 품종을 키울 수 있다.

[비뉴 베르데의 9개 세부 산지 (출처: 와인폴리)]
비뉴 베르데는 미래는 밝다
비뉴 베르데는 무엇보다 가격대가 좋다. 이는 포르투갈의 땅값과 노동력이 다른 중부 유럽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르투갈, 그리고 비뉴 베르데의 잠재력은 이미 널리 알려져 EU를 비롯한 다양한 기관이 큰 투자를 하고 있다. 최근 국제적 수상 기록을 쌓고 있는 비뉴 베르데 와인은 10년 전과 무척 다르다는 평가를 받는다. 새로운 빈야드 조성, 플랜팅 시스템, 그리고 새로운 세대의 와인메이커들에 의해 매년 시장을 놀라게 하는 와인들이 나오고 있다.
전통적인 스타일의 신선한 비뉴 베르데가 세계 각국의 소비자들의 입맛을 사로잡으며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몇몇 생산자들은 알바리뇨 같은 품종으로 훨씬 복합적이면서 구조감이 있는 와인을 생산한다. 미묘하게 오크 특성을 넣기도 하고, 싱글 빈야드 이름을 넣어 내놓기도 한다. 다채로운 모습의 비뉴 베르데는 단지 '어릴 때 마시는 영한 녹색 와인'이 아닌,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와인 지역으로 거듭나고 있다. 오늘밤 파릇파릇한 매력이 넘치는 녹색 와인 산지의 와인을 가볍게 한 병 비워보는 것은 어떨까?
* 10월 24일 앰배서더 서울 풀만 호텔에서 <비뉴 베르데 그랜드 테이스팅>이 개최된다. 와인업계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200여 종 이상의 비뉴 베르데 와인을 선보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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