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사랑받는 브랜드들의 성공 요인 중 첫손가락에 꼽을 만한 것은 '신뢰'일 것이다. 품질에 대한 신뢰, 브랜드의 철학에 대한 신뢰, 그리고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신뢰. 캘리포니아의 실버 오크(Silver Oak)는 '가장 미국적인 와인'이라는 평을 얻으며 50년 이상 신뢰를 쌓아온 와이너리로, 한국을 포함한 세계 시장에서 오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최근 실버 오크의 소유주인 데이비드 던컨(David R. Duncan) 회장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다. 그와 함께 여러 와인을 시음하며 브랜드에 얽힌 이야기를 나눴고 와이너리의 가장 최신 소식도 접할 수 있었다.

[한국을 찾은 데이비드 던컨 회장]
실버 오크는 1972년 데이비드 던컨 회장의 아버지인 레이몬드 투미 던컨(Raymond Twomey Duncan)과 와인메이커 저스틴 메이어(Justin Meyer)가 나파 밸리에 공동 설립한 와이너리다. 2001년부터는 던컨 가문이 완전히 경영권을 가지고 현재 가족 경영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실버 오크 외에도 투미(Twomey), 타임리스(Timeless), 오비드(Ovid)의 네 개 브랜드로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던컨 회장은 훌륭한 와인을 만들기 위한 철학으로 친환경과 지속가능성을 강조했다.
“우리는 바로 오늘처럼 즐거운 자리에서 함께 즐기기 좋은 와인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품질이 좋아야 하죠. 포도는 대부분 와이너리에서 소유한 포도밭에서 직접 재배하고 일부는 오랜 기간 동안 파트너십을 맺고 있는 포도밭의 포도를 사용합니다. 특히 생산 과정과 유통 과정에서 사람과 환경, 자원에 대한 지속가능성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실버 오크 알렉산더 밸리 와이너리, 사진제공: 하이트진로]
실버 오크의 양조장은 태양광 판을 설치해 필요한 전기를 100% 생산하며, 양조장의 폐수를 재처리해 사용하는 방식으로 물을 절약하고 있다. 나파 밸리 카베르네 소비뇽과 알렉산더 밸리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을 위한 양조 시절을 별도로 운영하는데, 실버 오크의 오크빌 양조장은 2016년 세계 최초로 지속가능성 인증인 'LEED(Leadership in Energy and Environmental Design)'를 받았다. 또한 알렉산더 밸리 양조장은 2018년 'LEED Platinum' 인증을 받았고, 2020년에는 친환경 건물 인증인 'LBC(Living Building Challenge)'도 받았는데 이는 와이너리로서는 세계에서 유일하다.
실버 오크는 카베르네 소비뇽 품종에 집중하고 오직 미국산 오크 배럴을 사용해 음식과 즐기기 좋은 장기 숙성용 와인을 생산한다는 설립 초기의 취지를 이어오고 있다. 특히 미국산 오크 숙성만 고수하는 것은 나파 밸리의 다른 컬트 와인과 차별화되는 부분으로, 가장 미국적인 와인 스타일을 보여주는 실버 오크의 정체성과도 연결된다. 그리고 실버 오크 이외의 브랜드에서는 다른 품종으로 새로운 스타일의 와인도 생산한다. 던컨 회장의 할머니의 이름을 따른 투미(Twomey)나 던컨 회장의 아버지인 레이몬드 투미 던컨에게 헌정하는 타임리스(Timeless)가 바로 그런 와인들이다.

[투미를 생산하는 베어만 벤드 빈야드(Bearman Bend Vineyard), 사진제공: 하이트진로]
카베르네 소비뇽을 넘어선 확장, 투미
투미는 1999년 던컨 가족이 카베르네 소비뇽 이외의 포도로 와인을 생산하기 위해 설립한 부티크 와이너리다. 와인메이커 저스틴 히리고옌(Justin Hirigoyen)이 투미를 전담하며, 캘리포니아 산타 마리아 밸리(Santa Maria Valley)부터 오리건의 윌라메트 밸리(Willamette Valley)에 이르기까지 여러 뛰어난 포도원에서 소비뇽 블랑과 피노 누아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이번 방한 행사에서 선보인 투미 소비뇽 블랑(Twomey Sauvignon Blanc)은 나파 카운티와 소노마 카운티의 4개 빈야드에서 지역 블렌딩으로 생산한 와인이다. 품종은 같은 소비뇽 블랑이지만 기후에 차이가 있는데 블렌딩으로 균형을 맞추고 신선함과 복합미를 살렸다. 던컨 회장과 함께 시음한 2022년은 특히 뛰어난 해로 꼽는 빈티지다. 크리스피한 산도와 함께 풀향, 핵과일의 캐릭터가 잘 드러나고 신선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느낌으로, 잘 만든 미국 소비뇽 블랑의 전형을 보여준다. 투미 러시안 리버 밸리 피노 누아(Twomey Russian River Valley Pinot)는 투미가 생산하는 11개 피노 누아 와인 중 가장 처음으로 생산한 와인이다. 해안가에 가까운 러시안 리버 밸리 특유의 섬세하고 우아한 풍미를 느낄 수 있다. 손 수확한 포도를 사용하고 14개월간 오크 숙성을 했는데 실버 오크와 달리 100% 프렌치 오크를 사용한 것이 특징이며 그 중 28%는 새 오크를 사용했다. 2021 빈티지를 시음했는데 붉은 과실향이 아주 잘 드러나고 부드러운 타닌의 질감이 인상적이다.
투미의 와인을 경험하다 보면 왜 샤르도네 와인은 생산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이 자연스레 나온다. 이 질문에 던컨 회장은 한국에서 공개하는 '시크릿'이라며 오리건 지역에서 드디어 샤르도네 생산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려줬다. “던디 힐(Dundee Hills) AVA에 자리한 프린스 힐 빈야드(Prince Hill Vineyard)에서 생산하는 샤르도네로 신선함을 강조한 스타일이에요. 400케이스 정도 생산했고 레이블 디자인도 이제 막 완성됐습니다.” 실버 오크가 투미를 통해 선보인 소비뇽 블랑과 피노 누아의 뛰어난 품질을 확인한 이들에겐 샤르도네 생산이 더없이 반가운 소식이다.

[실버 오크 알렉산더 밸리 카베르네 소비뇽과 나파 밸리 카베르네 소비뇽]
미국 정통 카베르네 소비뇽, 실버 오크
지금의 실버 오크의 명성을 만든 건 역시 카베르네 소비뇽이다. 1972년 던컨 회장의 아버지가 처음으로 구입한 포도밭은 알렉산더 밸리였다. 물론 당시에는 지금처럼 나파 밸리와 알렉산더 밸리로 AVA가 구분되지 않았지만 카베르네 소비뇽을 생산하기 위한 최고의 조건을 갖춘 곳으로 판단했던 그 선택은 옳았다.
가장 유명하고 친숙한 레이블인 실버 오크 알렉산더 밸리 카베르네 소비뇽(Silver Oak Alexander Valley Cabernet Sauvignon)은 실버 오크의 시그니처로 꼽히는 와인이다. 블렌딩 비율은 매년 바뀌는데 2018 빈티지는 카베르네 소비뇽 94.8%, 메를로 4.2%, 카베르네 프랑 1%를 사용했고, 2년간 100% 미국산 오크에서 숙성 후 18개월간 병 숙성했다. 2018년은 이상적인 기후 조건 덕분에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모두 훌륭한 해로 평가한다. 실버 오크 나파 밸리 카베르네 소비뇽(Silver Oak Napa Valley Cabernet Sauvignon)은 보다 전통적인 스타일로 생산된 와인이다. 2018 빈티지의 경우, 카베르네 소비뇽 76%, 메를로 15.2%, 카베르네 프랑 5.1%, 쁘띠 베르도 3.2%, 말벡 0.5%로 알렉산더 밸리보다 조금 더 다양한 품종을 사용했다. 2년간 100% 미국산 오크에서 숙성했고 병 숙성 20개월을 거쳐 출시한다.
두 와인 모두 포도 수확 후 따로 발효하는 방식으로 포도가 가진 각 테루아의 특성을 살리고, 배럴 숙성시 블렌딩을 한다. 풍부한 검은 과실 풍미와 부드러운 타닌, 긴 여운이 느껴지는 알렉산더 밸리 카베르네 소비뇽은 묵직하면서도 다가가기 어렵지 않은 스타일이라 그 인기가 충분히 공감되는 와인이다. 나파 밸리 카베르네 소비뇽은 메를로의 블렌딩 비율이 알렉산더 밸리보다 조금 더 높은데, 검은 과실 향과 함께 커피, 코코아 풍미가 올라오고 부드러우면서도 깊이와 중후한 매력이 느껴진다.

[타임리스의 스토리를 들려주는 데이비드 던컨 회장]
시대를 초월하는 가치, 타임리스
와이너리에서 가장 특별한 의미가 담긴 와인, 타임리스(Timeless)는 데이비드 던컨 회장이 2015년 작고한 아버지에게 헌정하는 의미가 담겼다. 놀랍게도 와인을 만들기 전에 그는 같은 제목의 노래를 만들었다고 한다. 알고 보니 던컨 회장은 대단한 음악 애호가로 밴드를 한 경험도 있었다. “아버지의 85세 생신이 다가올 무렵, 선물로 '타임리스'라는 노래를 작사·작곡했습니다. 그런데 생신을 2주 앞두고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노래를 듣지 못하셨어요. 이후 아버지가 많이 좋아하셨던 포도밭에서 와인을 만들면서 그 노래 제목을 와인 이름으로 정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좋아했던 포도밭은 나파 밸리에서도 남동쪽에 위치한 소다 캐년 랜치(Soda Canyon Ranch)다. 6개의 마이크로 빈야드로 구성된 이곳은 특히 메를로가 잘 자란다. 이외에도 토양 구성이 다양해 카베르네 소비뇽, 쁘띠 베르도, 카베르네 프랑 등을 재배하고 매년 그해의 수확에 따라 다른 블렌딩으로 와인을 생산한다. 신선한 산도와 부드러운 질감의 타닌, 훌륭한 구조감과 균형미가 느껴지며 감탄을 자아낼 만큼 우아한 인상을 주는 와인이다. 2017년 첫 출시한 뒤 2019년 세 번째 빈티지를 선보였고 한국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아버지의 유산을 기리는 이 와인의 백레이블에는 '타임리스'의 노래 가사가 적혀 있고,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like fine wine / like kindness / that's what you are / timeless.” 데이비드 던컨 회장은 와인을 즐기며 '타임리스'를 흥얼거렸다. 시대를 초월한다는 제목의 의미는 이런 게 아닐까. 음악과 와인에 담긴 소중한 존재에 대한 기억은 이렇게 다른 나라에서 다른 세대가 함께 공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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