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해외뉴스

8천 년 와인 역사의 현장, 이 시대에 살아있는 전통을 발견하다

와인문화가 성숙해진다는 건 그만큼 다양한 와인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도 조지아 와인을 만날 기회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특히 작년과 올해 서울에서 개최된 조지아 와인 시음회와 조지아 주요 와인 생산자들의 가이드 테이스팅, 조지아 국립 와인청에서 주최한 마스터 클래스 등을 통해 다양한 조지아 와인을 시음할 수 있었다. 그때마다 포도 품종의 다양성과 조지아의 전통적인 와인 양조용 토기인 크베브리로 만든 와인의 놀라운 품질을 느꼈다. 사페라비(Saperavi), 르카치텔리(Rkatsiteli), 므츠바네(Mtsvane), 키시(Kisi) 등 처음엔 그저 낯설기만 하던 토착품종의 이름이 점점 친숙해지고 그 매력에 빠져들 즈음, 조지아를 방문해 와인 생산 현장을 직접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트빌리시에 자리한 '조지아의 어머니' 동상]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Tbilisi) 시내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언덕 위에 우뚝 솟은 '조지아의 어머니' 동상이다. 1958년 트빌리시의 도시 건립 1500주년을 기념해 세워진 이 거대한 동상은 한 손에 친구를 환대하기 위한 와인을, 또 다른 손에는 적을 막기 위한 검을 들고 있는 강인한 여성의 모습이다. 동상 아래까지 가까이 다가가면 20미터에 이르는 압도적인 높이와 당당한 위상에 절로 감탄이 나온다. 조지아의 민족성이 깃든 이 동상이 손에 든 검은 전투가 끊이지 않았던 트빌리시의 역사를 의미하고, 와인은 조지아의 정체성과 깊이 연관된 와인 문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조지아 국립 박물관에 전시 중인 최초의 크베브리]


와인의 발상지로 불리는 조지아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양조 역사가 있는 국가다. 실제로 기원전 6천 년에 포도재배와 와인 양조를 한 고고학적 유물이 발견돼 전 세계 학자들로부터 최초의 와인 생산지로 인정받고 있다. 이번 방문에서 그 흔적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트빌리시에 자리한 조지아 국립 박물관(Georgian National Museum)에서 기원전 6천 년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최초의 크베브리를 마주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크베브리는 긴 세월과 복원의 흔적이 남아있을 뿐 현재의 크베브리를 그대로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박물관에 전시된 8천 년 전의 크베브리가 현 시대에도 비슷한 형태로 와인 양조에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크베브리 양조법은 2013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조지아 와인의 상징이자 자연의 연금술, 크베브리

트빌리시에서 차로 약 2시간을 달려 도착한 카헤티(Kakheti) 지역의 여러 와이너리에서도 현재 사용 중인 크베브리를 볼 수 있었다. 조지아 동부에 위치한 이 지역은 조지아 와인의 약 70% 이상이 생산되는 주요 와인산지다. 1929년 설립된 볼레로 & 컴퍼니(Bolero & Company)는 이 지역에서 손꼽히는 대형 와이너리로, 설립 당시 지어진 역사적인 건물에 224개의 크베브리를 가지고 있다. 현대적인 와인 생산시설도 갖춘 대규모 생산자지만 와이너리 측은 “우리의 중요한 유산을 지키기 위해 크베브리 와인 생산도 계속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크베브리가 있는 바지아니 와이너리의 숙성실]


운반이나 저장을 위한 용도로 사용하는 암포라와 달리, 크베브리는 양조용으로 사용하며 입구만 제외한 전체를 땅에 묻어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땅속에서 자연적으로 최적의 온도로 조절되며 한번 묻으면 지진 등으로 손상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크베브리 양조법은 지역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카헤티 지역에서 포도즙을 껍질과 씨, 줄기를 모두 함께 넣어 발효한다. 다른 첨가물 없이 야생 효모로 발효하며, 레드 와인의 경우 타닌이 과하게 추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2주 정도 후 포도 잔여물을 제거한다. 와이너리를 방문한 11월 초에는 크베브리의 뚜껑 아래로 포도껍질이 가득한 장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게 떠 있는 포도 잔여물은 시간이 흐르면서 아래쪽으로 자연스럽게 쌓이며 와인이 안정화되고, 이후 이듬해 봄까지 3개월에서 6개월 정도 숙성한다. 


조지아에서는 크베브리로 양조한 와인을 전통 와인이라 하고, 일반적인 유럽 방식으로 생산한 와인을 흔히 클래식 와인이라고 하는데 두 가지 스타일을 함께 생산하는 곳도 많다. 바지아니(Vaziani) 역시 전통 방식과 유럽 방식의 와인을 모두 생산하는 와이너리다. 이곳에서는 1907년 만들어진 크베브리도 사용하고 있다. 바지아니 와이너리의 아우리카 크로이터(Aurika Kroitor) 이사는 “복합적이고 풍부한 아로마가 느껴지고 타닌의 특징이 뚜렷한 드라이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크베브리에서 생산한 와인이 인기”라고 이야기한다. 크베브리에서 숙성한 앰버 와인은 지방이 많은 육류 요리와의 궁합도 훌륭하다. 와인 양조 시 껍질을 함께 넣기 때문에 향이 복합적이고 레드 와인 같은 타닌과 구조감을 갖춘 덕분이다. 이 와이너리는 생산량의 95%를 해외에 수출하며 일본이 최대 시장이다.


[쉴다 와이너리]


크베브리를 사용해 와인을 만드는 것은 노동력이 많이 들어가고 생산량도 제한적이기 때문에 효율성이 떨어진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최근 자연적인 양조 방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크베브리 역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젊은 와인 생산자들은 전통적인 크베브리에 기술력을 더해 전통을 재해석한 양조 방식을 선보이기도 한다. 2015년 설립된 쉴다(Shilda) 와이너리는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현대적인 와인 양조 시설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인 실험실도 운영하며 전통과 새로운 기술을 결합하고 있다. 조지아 와이너리 중 선구적으로 에너지 효율 최고 등급을 받은 이곳은 크베브리에 냉각 파이프를 설치하는 방식을 최초로 개발했다.


[조지아 화가 데이비드 카카바제의 작품 레이블]


쉴다 와이너리의 니카 페라제(Nika Peradze) 이사는 “발효 과정에서 아로마를 더 신선하게 유지하기 위해 개발한 장치로, 크베브리 안에서도 저온침용이 가능하도록 시스템을 구축했다”고 설명한다. 이곳은 카헤티에 위치하지만 서부 이메레티(Imereti) 지역의 양조 방식을 적용해 포도 잔여물의 일부만 넣고 발효하기도 하며, 야생 효모 외에도 배양 효모를 선택적으로 사용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리터 맨(Liter MAN)'처럼 캐주얼하고 감각적인 스타일로 젊은 세대를 겨냥한 와인이나 조지아의 유명 화가 데이비드 카카바제(David Kakabadze)의 풍경화가 담긴 레이블 등 흥미로운 스토리와 함께 친근하게 다가가는 와인들이 인상적이다.


[양조 방식에 대해 설명하는 카피스토니 와이너리의 와인메이커, 니코 쵸치시빌리]


또 하나의 주요 와인 산지인 카르틀리(Kartli) 지역에 자리한 카피스토니(Kapistoni) 와이너리는 잘 알려지지 않은 토착 품종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있는 생산자다. 조지아에서는 지금까지 총 525종의 토착 포도품종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고 그 중 수십 종이 상업적 양조에 사용되고 있다. 오랜 와인 양조 역사에 존재하다 소비에트 연방 시절을 거치며 잊혔던 품종이 최근 새롭게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7대에 걸친 와인 양조의 유산을 이어가고 있는 카피스토니 와이너리의 오너이자 와인메이커 니코 쵸치시빌리(Niko Chochishvili)는 “포도의 고유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자신의 양조철학이라고 강조한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되살린 포도 품종들은 무엇보다 그 캐릭터를 온전히 알릴 필요가 있기 때문에 오크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오직 크베브리만 사용해 순수한 맛을 최대한 살리는 방식으로 양조한다고 말한다. 그만큼 생산량도 제한적인데 10여 종의 와인은 대부분 몇천 병만 한정 생산하고 백레이블에는 넘버링을 표기한다.


이곳에서는 처음 접하는 품종들이 대거 등장했다. 색이 연하면서 부드럽고 아로마가 풍부한 샤프카피토(Shavkapito) 품종은 카헤티에 비해 상대적으로 서늘한 카르틀리 지역에서 자라는 토착품종으로 섬세한 피노 누아를 연상시킨다. 또다른 레드 품종인 아수레툴리 샤비(Asuretuli Shavi)와 타브크베리(Tavkveri)는 사페라비보다 부드러운 스타일이면서 우아한 타닌과 여운은 부족하지 않다. 바디감이 탄탄한 치네불리(Chinebuli)나 이메레티 지역에서 주로 생산하는 쿤드자(Kundza) 등은 조지아 화이트 품종의 다채로운 스타일을 실감케 했다. 카피스토니의 와인들은 조지아 와인의 품종 다양성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가장 오랜 역사가 있는 양조 방식을 사용해 최소한의 개입으로 최대한 자연스럽게 생산했을 때 얼마나 품격 있는 와인이 탄생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카피스토니에서 다양한 토착품종으로 생산하는 와인들]


가치를 인정받는 전통은 어딘가에 박제된 것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조지아의 와이너리들은 오래된 유산을 지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철학을 더해 현시대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다양한 품종과 스타일의 개성 있는 조지아 와인에서 바로 그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 다음 기사에서는 조지아로 와인 여행을 떠날 이들을 위한 추천 와이너리와 그들의 와인을 소개한다.  

<가장 클래식하고도 트렌디한 여행, 조지아 와이너리 투어>


프로필이미지안미영 편집장

기자 페이지 바로가기

작성 2023.11.30 10:52수정 2023.12.11 18:44

Copyrights © 와인21닷컴 & 미디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신 이벤트 전체보기

최신 뉴스 전체보기

  • 태즈메이니아 와인 트레이드 쇼
  • 조지아인스타그램
  • 자이언트스텝스
  • 포데르누오보

이전

다음

뉴스레터
신청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