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스페인 라 만차 방문기 (2)] 라 만차의 숨겨진 힘, 와인 협동조합

우리가 마시는 와인 중에는 종종 와인 협동조합(winemaking cooperative)에서 생산되는 와인이 있다. 전 세계 거의 모든 와인 지역에 와인 협동조합이 있으며, 특히 유럽에서는 산업화 이후 백 년 가까이 와인 산업을 이끌어 온 숨겨진 힘이다. 특정 지역에서 생산되는 모든 와인이 하나의 협동조합에서 생산된 경우도 많다. 다만 와이너리 이름만으로는 쉽게 알기 힘들기 때문에 잘 모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와인 협동조합이라니. 아무래도 조금 낯선 느낌이다. 협동조합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지구에 생명이 처음으로 생겨난 시기로 돌아가보자.


오래 전 지구에 생명이 생겨난 뒤, 생물들은 진화를 거듭했다. 초기의 유기체부터 진핵 세포, 다세포 등 생물의 형태는 복잡해졌으며 어느 순간 집단을 이루는 사회성 유기체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사회성의 정점은 진사회성(eusocial) 집단의 출현이었다. 현대의 찰스 다윈이라고 불리는 하버드대학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의 정의에 따르면, 진사회성 집단은 각 개체들이 전문적인 역할을 담당해 높은 수준의 협력과 분업이 이뤄지는 집단이다. 인류도 진화의 과정 중 어느 순간 진사회성의 모습을 띄게 됐다. 사회적 상호 작용으로 더 높은 지능을 지닌 생물로 진화하며 각기 다른 목적과 목표를 갖는 매우 다양한 집단이 탄생했다. 19세기 중엽 자본주의가 성립하고 발달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회문제가 일어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근대 인류사에서 중요한 집단이 나타났다. 바로 협동조합(cooperative)이다. 경제적 약자층이 서로 협력하며 효율적 분업을 통해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형태로, 여전히 협동조합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와인을 만드는 데는 비용이 많이 든다. 근대에 이르러 양조 기술이 크게 발전함에 따라 여러 와인 양조 장비를 구입해야 하고, 와인을 숙성하기 위한 도구와 시설 또한 필요하다. 또한 와인을 판매하기 위해서는 마케팅을 비롯한 별도의 활동이 필요하다. 포도농사를 짓는 농부 입장에서는 이러한 일을 모두 홀로 하기는 무척 힘들다. 그래서 대안으로 생각해낸 것이 와인 협동조합이었다.


[비르겐 데 라스 비냐스 와인 협동조합의 와인 생산 시설]


포도밭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조합원으로 모여 공동의 와인 양조 장비를 구입한다. 그리고 와인 양조 기술을 가진 사람을 고용해 자신들이 공급하는 포도로 와인을 생산한다. 또한 마케팅 활동을 담당하는 사람도 고용해 와인 판매에 대한 부분을 일임한다. 이런 와인 협동조합은 1930년대 초반 세계 대공황 이후 급격히 늘어났다. 전 세계 거의 모든 와인 지역에서 와인 협동조합이 나타났는데, 프랑스 샹파뉴나 보르도처럼 유명한 와인 산지 역시 예외는 아니었고 여전히 와인 생산량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EU에서는 이러한 협동조합 형태를 권장하며 보조금을 지원하기도 하는데 이로 인해 지금도 활발하게 유지되고 있다. 


스페인도 마찬가지다. 1980년대 자료에 따르면 한 해 수확되는 포도의 60%가 스페인 전역에 위치한 1천 개 이상의 협동조합으로 간다고 조사됐는데, 이 상황은 현재도 큰 차이가 없다. 스페인의 대표 와인 산지 리오하에서도 포도의 40% 이상이 협동조합으로 판매된다. 단지 예전과 달라진 점은 전에는 병입 후 판매하는 와인이 10-15% 정도이고 나머지는 벌크 형태로 판매했는데, 20세기 초반부터 병입 후 판매하는 와인의 양이 크게 늘었다는 점이다. 또한 많은 협동조합의 시설이 현대화됐으며 품질도 급격히 상승했고 국외 수출에도 크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얼마 전, EUWINA(European Wine Ambassadors) 캠페인의 일환으로 라 만차를 방문해 두 개의 중요한 협동조합을 둘러볼 수 있었다. 라 만차에는 현재 백 개 이상의 협동조합이 있으며, 실제로 국내에서 볼 수 있는 라 만차 와인의 대다수도 이러한 협동조합의 와인들이다. 이 두 협동조합을 소개해 본다.


[만자바카스 협동조합의 와인 생산 시설]


만자바카스(Manjavacas) 협동조합 

라 만차 중심부에 위치한 마을, 모타 델 쿠에르보(Mota del Cuervo)의 와인 협동조합이다. 1948년 지역 포도재배자들이 함께 와인을 만들고자 설립했으며 현재 615명의 포도 재배자들이 소속돼 있다. 이들의 포도밭 면적은 6천 3백 헥타르에 이른다. 모타 델 쿠에르보의 인구가 6천 명 정도이니, 이 마을의 거의 모든 포도재배자들이 소속돼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특히 2005년 모든 시설을 현대화했으며 14만 제곱미터 공간에 5천 리터에서 백만 리터 크기의 발효 및 저장 탱크 103개, 한 시간에 1천 5백 병의 와인을 완성할 수 있는 보틀링 시설, 1천 제곱미터의 와인 저장 공간 등의 시설로 업그레이드했다. 매년 5천만 리터의 와인을 생산하고 있으며 생산 와인의 85%가 국제 시장으로 판매된다.


대표 와인은 산도갈(Sandogal)과 자가론(Zagarrón)이 있다. '산도갈'은 유기농으로 재배한 포도만을 이용한 프리미엄 라인으로, No.1 (베르데호), No.2 (소비뇽 블랑), No.3 (쁘띠 베르도), No.4 (템프라니요) 등 4가지 품종으로 생산된다. 또한 특별한 포도밭에서만 엄선한 포도로 만든 셀레시온 파셀라(Seleccion Parcela) 시리즈도 있다. '자가론'은 만자바카스의 주력 생산 와인으로 라 만차의 대표 품종인 템프라니요와 아이렌 등을 이용한다. 또한 알데아(Aldea)라는 논알코올 와인도 생산하고 있다. 


특히 산도갈 셀레시온 파셀라의 품질이 매우 인상적이었으며, 좋은 포도밭의 포도로 생산한 와인 협동조합의 와인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느낄 수 있었다. 실제로 라 만차에서 테이스팅한 모든 와인 중에서도 손꼽을 만한 품질을 보여주었다. 


[만자바카스 산도갈 시리즈]



비르겐 데 라스 비냐스(Virgen de las Viñas) 협동조합

1961년 라 만차의 중심 마을인 토메요소(Tomelloso)에 15명의 조합원으로 시작된 와인 협동조합으로, 현재는 3천 명이 넘는 조합원이 있는 스페인에서 가장 큰 협동조합 중 하나다. 토메요소는 DO 라 만차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마을로 전체 인구가 3만 6천 명 정도인데, 이 정도 규모면 토메요소에서 포도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속해 있다고 보면 된다. 조합원의 포도밭 규모만 2만 헥타르에 달하며 1년에 2억 5천만 킬로그램의 포도가 수확된다. 에이징 셀러에는 2억 리터 이상의 와인이 보관돼 있고 배럴의 개수만 8천 개, 한 시간에 최대 9천 병까지 보틀링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다.


[수확한 아이렌을 담은 트럭이 와이너리에 도착하면, 바로 품질 분석을 시행해 품질별로 따로 양조한다]


지속적인 리모델링으로 거의 모든 것이 자동화되어 가장 현대적인 와인 생산시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와인 역사 박물관과 현대 미술관도 함께 갖추고 있으며, 매년 스페인 전역을 대상으로 하는 미술 대회와 저널리즘 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2016년에는 스페인의 국왕 내외가 방문하기도 했다.


와인은 토미야르(Tomillar), 리엔소(Lienzo), 옥타보 아르테(Octavo Arte) 등 여러 레인지가 출시된다. 어떤 와인이든 현대적인 양조 시설에서 정교한 와인메이킹 기술을 통해 완성된 훌륭한 품질의 와인이라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 가격대도 훌륭하고 국내에도 이미 여러 수입사가 수입 중이다. 토메요소 마을에 하루 정도 머물렀는데, 가는 곳마다 토미야르 와인을 볼 수 있었다. 마을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와이너리 같다는 인상을 받을 정도였다.


[비르겐 데 라스 비냐스의 대표 와인 토미야르]


진사회성은 철저하게 이타성에 바탕을 둔다. 와인 협동조합 또한 이타성에 기반을 둔다. 포도재배자들은 자신의 이름이 익명화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집단 구성원 전체의 이익을 도모한다. 또한 협동조합이 주식회사와 가장 다른 점은 주된 목적이 영리 추구에 있지 않고 모든 조합원의 전체 이익을 함께 추구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이기적인 개체가 이타주의자에게 승리를 거두는 경우를 자주 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타주의자 집단은 이기적인 개체로 이뤄진 집단에 승리를 거둔다는 점인다. 와인 협동조합은 진사회성을 지닌 인간 본성에 숨어있는 이타성을 멋지게 보여주는 좋은 예다.


프로필이미지유민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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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23.12.05 11:14수정 2024.05.13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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