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조향사의 와인 노트] 우아한 꽃향기, 자스민

* 와인21은 올봄부터 아로마 시리즈 [조향사의 와인 노트] 연재를 시작합니다. 매월 조향사의 관점으로 향기 이야기와 조향계에 얽힌 이야기를 전하고, 향 제품과 와인을 소개합니다. 

 


'한 송이의 아름다운 모리화, 가지마다 향기가 가득하네.'


이는 중국 강소 지방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통 민요 '모리화'의 한 구절이다. 중국의 영부인 펑리위안은 국민가수이던 시절 모리화, 즉 자스민 꽃의 아름다운 향기를 노래했다. 우리는 이러한 노래뿐 아니라 수많은 향수와 와인에서도 자스민의 향기와 마주하고 스쳐지나기를 반복해 왔다. 생명력 넘치는 푸릇한 이파리와 우윳빛 꽃잎을 가진 자스민은 어떤 향기를 품고 있을까.


자스민의 대표적인 산지로는 인도와 중국, 프랑스, 모로코, 그리고 이집트의 나일강 삼각주를 꼽을 수 있다. 특히 조향계에서는 이집트 자스민을 선호한다. 이곳의 수확은 5월의 끝자락에서 시작해 초겨울이 되어서야 마무리된다. 해가 저물고 나면 갈대로 만든 바구니를 든 사람들이 이 작고 하얀 꽃을 손수 따기 시작한다. 자정 무렵 자스민이 내뿜는 향기는 손으로 만져질듯 절정을 이룬다. 중국에서는 여성성을 상징해 왔고, 중세 시대 유럽에서는 성모 마리아의 꽃으로 여겨진 자스민은 그 명성에 걸맞게 가장 우아한 꽃향기를 가지고 있다. 도입부에서 풋풋한 과일향과 상쾌한 꽃향이 반짝이고, 뒤이어 코코넛이나 피치에서 느껴지는 보드라운 과육의 느낌이 더해지며 도톰한 질감의 흰꽃잎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진정한 자스민의 향기는 오렌지블라썸을 닮은 짙은 꿀향과 주성분 중 하나인 인돌(Indole)이 전하는 육감적인 애니멀릭 노트로 완성된다.


모든 자연물의 향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향수이다. 각 식물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자연에서 향이 나는 분자들을 끌어모아 조합하고, 꽃 피운다. 고로 한 향기가 발현되기까지는 그것의 근간이 되는 수많은 분자들이 필요하다. 와인도 마찬가지이다. 와인으로 주조되면서 자스민을 닮은 향기가 나는 포도 품종으로는 뮈스카, 알바리뇨, 피노 그리, 리슬링, 슈냉 블랑, 비오니에 등이 있다. 이 품종들은 공통적으로 깨끗한 꽃향을 내는 테르펜(Terpenes)류 분자들인 리날룰(Linalool)이나 알파-테르피네올(Alpha-terpineol)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런 성분이 두드러지면 라일락이나 프리지아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여기에 아밀 아세테이트(Amyl acetate)나 헥실 아세테이트(Hexyl acetate)의 아직 덜 익은 서양배나 바나나와 같은 과일향이 더해지면 자스민 노트에 한발 더 가까워진다. 더 나아가 살구나 복숭아, 코코넛의 뉘앙스를 내는 락톤(Lactones)류 성분들과 오렌지블라썸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메틸 안트라닐레이트(Methyl anthranilate)가 포함되면 비로소, '와! 우아한 꽃향기가 난다!'하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와인에서 자스민이 느껴질 정도가 되려면 굉장히 풍부한 향기 성분이 생성되어야 한다. 이 아름다운 향기에 대한 접근성을 조금이나마 높이는 방법을 소개하자면 오크 배럴에서 숙성된 와인을 선택하는 것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동일한 와인을 각각 스테인레스 탱크와 오크 배럴에 숙성시킨 후 아로마 성분을 비교해본 결과, 후자의 와인에 알코올 및 에스테르 성분과 같은 향 분자들이 더 많이 함유돼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성분들은 모두 효모에 의한 발효 과정에서 활발히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한 잔의 샴페인과 함께한 어느 저녁, 입 안을 가득 채우는 자스민의 꽃내음에 감탄한 적이 있는가. 이것 역시 두 번의 발효를 거치는 스파클링 와인의 주조 과정이 만든 마법이다. 모든 와인이 자스민의 향기를 전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찾기 위한 숨바꼭질은 언제나 우리를 즐겁게 한다.


자스민의 향기가 돋보이는 향수와 와인

자스민은 장미와 함께 조향계를 대표하는 플로럴 노트이며, 과거부터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향수로 만들어져 왔다. 다양한 향 노트들의 층위를 향유하도록 해주는 향수보다 자스민 본연의 매력이 충분히 표현된 작품들을 소개한다. 자스민의 아름다움이 한껏 드러난 향수들을 시향하고 나서 와인21이 제안하는 와인들을 접한다면 이 아로마가 가진 진면목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2016년 출시된 랑콤(Lancôme)의 자스민 마지팬(Jasmins Marzipane)은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탄생시킨 조향사 도미닉 호피옹(Dominique Ropion)이 자스민을 주제로 선보인 향수이다. 중심에는 로얄 자스민과 삼박 자스민, 서로 다른 두 종의 자스민이 당당한 자태를 뽐낸다. 인돌의 애니멀릭한 뉘앙스가 분명하게 느껴지지만, 전반을 감싸는 머스크와 바닐라는 포근하고 크리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프랑수와 드마시(François Demachy)가 조향한 디올(Dior)의 자도르 퍼퓸 도(J'adore Parfum d'eau)는 1999년 출시돼 프루티 플로럴 계열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오리지널 자도르의 명성을 이어간다. 네롤리와 그린 노트가 열어주는 상쾌한 도입부는 지나친 달콤함과 무게감을 덜어낸 순수한 자스민으로 연결된다. 투명할 정도로 가볍게 느껴지는 화이트 플로럴들의 향연이 긴 여운을 남긴다.


수백 년 간 전통을 이어온 아포테케리(Apothecary) 브랜드 산타 마리아 노벨라(Santa Maria Novella)의 숨은 명작 젤소미노(Gelsomino)는 이탈리아어로 '자스민'을 의미한다. 이름에 걸맞게 자정 무렵 이슬로 젖어가는 관능적인 자스민의 정수를 담고 있다. 생화의 향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나면 깊게 우려낸 자스민 차의 마지막 한 모금을 닮은 잔향이 평온을 알린다.


[(왼쪽부터) 그라모나 제사미, 마스카 델 타코 루  에따 피아노, 아리스토스 두케사]


잔을 코에 가까이하기만 해도 유려한 흰 꽃잎을 펼치는 와인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첫 번째로 소개할 와인은 이번 칼럼을 작성하다 조우한 그라모나 제사미(Gramona, Gessamí)이다. 스페인어로 자스민을 의미하는 '제사미'라는 이름에서부터 부드러운 꽃향기를 넌지시 건네며, 병에 그려진 이미지에서도 향기에 대한 힌트를 던지고 있다. 뮈스카과 소비뇽 블랑, 게뷔르츠트라미너가 블렌딩된 제사미 한 잔이면 상큼한 레몬, 풋풋한 서양배, 그리고 화사한 꽃향기와 함께 자스민 정원을 거니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두 번째 와인은 마스카 델 타코 루 에따 피아노(Masca del Tacco, L'Uetta Fiano)다. 이 와인에 사용된 피아노는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의 토착 품종으로 풍부하고 복합적인 아로마를 가지고 있는데, 특히 자스민이나 허니서클 같은 꽃향기가 나는 와인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백도와 잘 익은 서양배, 달콤한 멜론향이 두드러지는 루 에따 피아노는 디올의 자도르처럼 프루티 노트로 아름답게 꾸며진 자스민을 떠올린다.


마지막 와인은 샤르도네 품종을 통해 탄생한 아리스토스 두케사(Aristos, Duquesa)이다. 공작부인을 뜻하는 '두케사'에서 알 수 있듯 우아하면서도 파워풀한 향기를 가진 칠레 와인이다. 석회암과 자갈이 많은 토양에서 재배돼 충분한 미네랄리티를 갖춘 샤르도네가 말로라틱 발효를 거치며 락톤의 부드러움을 입었다. 프렌치 오크 숙성으로 완성되는 두케사에서 숨겨진 자스민의 뉘앙스를 찾아보자.


코르크 마개를 여는 순간부터 느껴지는 와인의 아로마는 병의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시시각각 변화하며 다양한 면모를 선보인다.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다양한 향 노트를 발견하고 향유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이다. 다음에는 또 어떤 향기와 함께하게 될까.

프로필이미지김태형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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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24.03.26 15:42수정 2025.05.15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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