잰시스 로빈슨(Jancis Robinson) MW가 최근 샌프란시스코에 방문했다. 8번째 에디션 <월드 아틀라스 와인(The World Atlas of Wine)>의 출판을 기념해 북 사인회와 세미나, 그리고 와인 디너를 주최한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와인애호가들의 성지로 꼽히는 K&L 와인숍과 협업해 진행됐다. 나는 세 개의 이벤트 중 디너 행사에 참석했다. 가장 프라이빗한 성격의 행사이기도 했고, 운이 좋다면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 눈도장을 찍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다.

잰시스 로빈슨 MW는 누구일까? 먼저 그녀를 소개하고 싶다. 1950년, 영국 북부 아주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잰시스 로빈슨은 옥스포드 대학교에서 철학과 수학을 전공했고 대학 시절 친구들과 와인을 마시며 와인의 매력에 점차 빠지게 됐다. 그녀를 본격적인 와인의 세계로 인도한 건 운 좋게 마신 한 잔의 샹볼 뮈지니 레자무레즈(Chambolle Musigny Les Amoureuses) 1959 빈티지였다. 당시는 엘리트 코스를 밟는 누군가가 와인이나 푸드 신에서 일하고 싶다면, 하찮고 시시한 일에 재원을 낭비한다는 타박을 듣던 시대였다. 그러나 그녀는 와인이 단순히 감각적 즐거움을 선사하는 음료가 아니라, 역사와 지리, 인간의 심리와 창의성, 그리고 수많은 과학적 사실로 가득 찬 지적 결정체라는 것을 알았다. 감각적이고 아카데믹한 그녀에게 와인은 마치 하나의 종합선물세트와 같았다.
스물 다섯이 되던 1975년, 그녀는 <와인 앤 스피리츠(Wine & Spirits)> 매거진의 보조 편집자로 일하며 와인업계에 발을 들였다. 이후 와인 무역업에 종사하지 않은 최초의 마스터 오브 와인(MW)이 되었고, 수많은 와인 도서를 집필했다. 그녀가 집필한 방대한 와인 백과사전 <옥스퍼드 컴패니언 투 와인(The Oxford Companion to Wine)>과 <월드 아틀라스 와인(The World Atlas of Wine)>, <와인 그래이프(Wine grapes)> 등은 와인을 진지하게 공부하는 학구파라면 꼭 보아야 하는 필독서로 꼽힌다.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와인 셀러를 담당한 영국 왕실의 와인 어드바이저였다는 이력도 흥미롭다. 영국 대영제국 훈장 및 프랑스의 농업훈장, 포르투갈의 기업가 훈장 등을 받았으며, <디캔터(Decanter)>지가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와인 평론가이자 저널리스트', '1999년 올해의 여성'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로버트 파커와 함께 양대 산맥 와인 평론가로 꼽히며, 20점 만점의 점수 체계와 그녀만의 '잰시스 스타일'을 확립했다. 그녀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마스터 오브 와인이자 와인 저널리스트, 베스트셀러 와인 작가, 영향력 있는 와인 평론가, 그리고 존경받는 와인 교육자다.
그런 잰시스 로빈슨을 직접 만나기 위해 설레는 마음으로 행사장에 들어서자, 리셉션에 그녀가 서 있었다. 똑 떨어지는 금빛 단발과 투명한 안경테, 선홍빛 립스틱. 사진으로 보아오던 바로 그 우아한 모습이었다.

디너를 시작하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선정한 7종의 와인을 소개했다. 부푼 희망과 달리, 테이블 좌석운이 썩 좋지 않았는데, 스피치를 끝낸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나도 모르게 스스로 마스터 오브 와인이 되고 싶은 와인 학도라고 소개했다. 그녀가 자리로 성큼 걸어왔다. 미리 가져온 <옥스퍼드 컴패니언 투 와인>을 꺼내자 웃음을 보였다. “이건 3번째 에디션이네. 이제 5번째 에디션이 나왔어요.” 그 책은 WSET 디플로마를 공부하던 시절, 3년 내내 끼고 있던 책이었다. 그녀가 내 이름 자스민이 'E'로 끝나는지 묻고 친절히 사인을 해주었다.
우리는 몇몇 보르도와 나파의 와이너리, 빈티지 변화에 대해 짧게 이야기했다. 한국에 방문한 적이 있냐고 물으니, “very Briefly”라며 한국 시장의 성장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반짝였고, 겸손했고, 에너지가 넘쳤다. 마지막으로 행사가 끝날 즈음, 그녀는 내게 “Good luck with your wine journey”라고 말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러 간 이탈리아 토스카나에서 와인이 감자만큼 흔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열여덟 살 시골 소녀가 50년의 방대한 지적 여정을 밟으며 와인업계를 아우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헌신과 신념이 있었을까? 그녀를 다시 소개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그녀는 한 분야의 진정한 '마스터'란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 질문에 답을 주는 인물이며. 진정한 의미의 '마스터' 오브 와인이다.

잰시스 로빈슨과 함께한 디너에서 그녀가 선보인 와인들을 소개한다.
구스본 블랑 드 블랑 Gusbourne Blanc de Blancs 2018
영국은 아이러니하게도 지구 온난화로 인한 효과를 누리고 있는 대표 와인산지 중 하나다. 특히 스파클링 와인의 품질은 샴페인의 대항마로 떠오를 정도로 잠재성을 인정받고 있다. 그녀가 선정한 와인은 그중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켄트(Kent) 지역의 와이너리. 2018은 영국에서 특히 따뜻했던 빈티지라고 한다. 그녀는 “I'm not shamed”라며 품질에 대한 자신감을 보였다. 영국에서 온 그녀가 선보일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첫 와인이었다.
라엔 레이디 마조리 퀴베 소노마 코스트 샤도네이 Raen Lady Marjorie Cuvée Sonoma Coast Chardonnay 2022
두번째로 따라진 와인은 <와인 스펙테이터(Wine Spectator)>가 선정한 2023년 올해의 와인 2위에 빛나는 라엔(Raen)의 샤도네이. 라엔은 캘리포니아 와인의 거장, 로버트 몬다비의 손자 카를로와 단테 몬다비가 세운 와이너리다. 그녀는 친구의 손자가 빚은 와인을 설명하며, 오래전 작고한 옛 친구와의 추억을 이야기했다. 두 사람은 남편이 운영하는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급속히 친해졌는데, 두 부부가 나파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한번은 대낮에 다섯 병의 와인을 마시고 여섯 번째 와인을 오픈하려는 그를 뜯어말린 적이 있다며 웃었다. 와인은 생동감과 미네랄이 가득했고, 추억을 공유하는 그녀는 친근해 보였다.
마르케스 드 무리에타 카펠라냐 블랑 Marques de Murrieta Capellania Blanc 2018
리오하 알타(Rioja Alta)에 위치한 싱글 빈야드에서 70년 이상 고목의 비우라 100%로 만든 화이트 와인이다. 그녀는 리오하가 레드보다 화이트 와인을 더 많이 생산한다며, 이 와인을 복합미와 풍부함, 신선함이 공존하는 놀라운 와인이라고 설명했다. 와인은 무척 세련되고 스타일리시했다. 고급 향수에서 맡을 법한 우디 향과 헤이즐넛, 스파이스 등이 하얀 과육과 묘하게 어울렸다. 그녀는 리오하에서 샤도네이나 소비뇽 블랑의 재배가 점차 늘어나는 트렌드라며 내심 불만을 표했다. 이런 비우라라면 열개의 프리미엄 샤도네이가 부럽지 않을 텐데, 리오하가 계속 본연의 매력을 지켜주길.

도멘 토르소 샤름 샹베르탱 그랑 크뤼 Domaine Tortochot Charmes-Chambertin Grand Cru 2005
잰시스는 훌륭한 품질과 접근성 있는 가격의 생산자로 도멘 토르소를 꼽았다. 물론 가격은 상대적이지만, 부르고뉴에서 공존하기 힘들다는 이 두 요소가 합쳐진 생산자라니 마치 희귀한 봉황을 만난 느낌이었다. 1990년대까지 포도 절반을 조셉 드루앙에게 판매했지만, 가업을 물려받은 딸이 야심차게 자신만의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숙성이 필요한 전형적인 쥬브레 샹베르탱 스타일로, 잰시스가 말하는 “Notoriously chewy vintage”의 풍부한 질감과 그랑 크뤼의 테루아가 만나 탄탄하고 매혹적인 자태를 뽐냈다.
주세페 마스카렐로 '몽프리바토' 바롤로 Giuseppe e Figlio Mascarello 'Monprivato' Barolo 2007
애정하는 생산자가 등장했다. '몽프리바토' 밭을 독점하고 있는 바롤로의 전통주의 생산자이다. 2007년은 우박이 덮쳐 소출량이 적었던 빈티지지만, 따뜻하고 건조한 성장기를 보냈다. 빈티지의 영향인지 조금 더 과실이 익은 느낌. 붉은 과실, 송진, 장미, 오렌지 껍질, 찻잎 등의 복합적인 아로마와 옅은 가넷빛 컬러와는 대조적인 촘촘한 타닌까지, 클래식한 웰메이드 바롤로의 전형을 보여줬다.
샤토 레오빌 바르똥 Chateau Leoville Barton 1994
보르도 생 줄리앙(Saint-Julien)의 2등급 와인. 그녀는 레오빌 바르똥을 보르도에서 가장 좋아하는 샤토이자, 품질에 비해 가격을 항상 적절히 유지하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그렇지, 그녀는 가격 거품 경쟁에 열을 올리는 와이너리에 쓴소리를 마다 않고, 가격과 품질의 절대적인 상관관계는 없다고 믿는 저널리스트다. 매콤한 레드 칠리류의 허베이셔스 향과 얼시한 향이 내가 좋아하는 잰시스 스타일의 보르도 와인이었다.
샤토 쿠테 '뀌베 마담' Chateau Coutet 'Cuvee Madame' 1995
샤토 쿠테에서 아주 특별한 빈티지에만 생산한다는 플래그십 와인. 평균 55년 수령의 세미용을 100% 사용하고, 총 3년의 배럴 숙성과 최소 10년 동안의 병입 숙성을 거쳐 출시된다고 한다. 10년 주기로 평균 3번의 빈티지가 출시되는데 각 생산량이 1,200-1,400병 정도인 매우 귀한 귀부와인이다.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싱그러운 청년의 모습으로, 이날의 디너를 더없이 달콤하고 끝없는 여운으로 마무리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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