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티지 샴페인을 접할 때마다 이 특별한 샴페인이 거쳐온 '시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좋은 빈티지를 기념해 그 해의 포도만으로 샴페인을 만들기로 결정한 바로 그 해의 시간, 이후 세상에 출시되기까지 긴 기다림의 시간, 그리고 마침내 처음으로 오픈하는 그 날의 시간. 지난 4월 22일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볼랭저(Bollinger)의 빈티지 샴페인 라 그랑 아네(La Grande Anée) 2015년 빈티지를 공개한 날이었다. 시장에 출시되기 전, 마스터 클래스를 통해 먼저 선보였고 이 특별한 자리에는 가문의 6대손인 시릴 들라뤼(Cyril Delarue)가 함께했다.

[볼랭저 가문의 6대손, 시릴 들라뤼]
세계적인 샴페인 하우스 중에서 설립 당시부터 지금까지 소유주가 바뀌지 않고 가족 경영으로 운영하고 있는 곳은 단 세 곳이며, 그 중 하나가 볼랭저다. 1829년 샹파뉴의 아이(Aÿ) 마을에서 출발해 몇 년 뒤면 200주년을 맞는다. 시릴 들라뤼는 “가족 경영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가격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고, 언제나 품질을 우선시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점이 볼랭저를 특별하게 만든다. 좋은 와인을 만들 수 있다면 효율을 따지지 않는다는 것, 이는 1941년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사업을 이어받아 평생을 헌신하며 볼랭저의 명성을 드높인 마담 릴리 볼랭저(Madame Lily Bollinger)의 철학이기도 하다.
볼랭저는 180헥타르의 포도원을 소유하고 있어 포도의 품질관리는 물론이고, 지속가능성과 유기농 생산에 투자하며 장기적인 계획에 따라 운영하고 있다. 샹파뉴 지역에서 거의 사라진 배럴 발효를 고수하며 훌륭한 질감과 복합미를 만들어낸다는 점, 리저브 와인을 매그넘 크기의 병에 자연 코르크로 마감해 숙성한다는 점 역시 볼랭저의 철학에 따른 선택이다. 피노 누아를 핵심적인 품종으로 사용한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볼랭저에서는 피노 누아를 최소 60% 이상 블렌딩해 복합미와 숙성잠재력을 더한다. 볼랭저의 아시아 퍼시픽 디렉터인 티보 조베르(Thibaut Jaubert)는 “전 세계적으로 화이트 와인의 소비가 증가하고 있고, 샹파뉴 지역에서도 샤르도네가 인기를 누리지만 우리는 트렌드를 따르지 않고 우리가 중시하는 가치를 위해 피노 누아를 선택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여기서도 '시간'을 언급해야 한다. 볼랭저는 100% 독립적인 가족 소유 샴페인 하우스로서, 샴페인의 완성도가 충분히 높아질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여유가 있다. 규정상 15개월 이상 숙성하면 되는 기본급 샴페인도 3년간 숙성하고, 3년 이상 숙성해야 하는 빈티지 샴페인은 최소 6년 이상, 보통 7년간 숙성한다. 이번에 선보인 라 그랑 아네 2015 빈티지 역시 7년 숙성 후 출시했다.

숲의 정취를 경험하는 감각적 순간
라 그랑 아네 2015 빈티지의 주제는 '그랜드 캐노피(The Grand Canopy)'다. 숲의 정취가 느껴지는 캐노피로 초대하듯 소개한 것은 가문이 소유하고 있는 숲의 역사와도 연결된다. 약 200년 된 나무가 우거진 숲에서 배럴에 사용할 목재를 공급받고, 이는 볼랭저 샴페인의 정체성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캐노피는 특별했던 2015년의 기후와도 관련이 있다.
2015년 샹파뉴 지역은 서늘했던 2014년과 대조적으로 유독 기온이 높은 해였다. 온화하고 종종 비가 내린 겨울을 보낸 뒤 4월에는 2007년 이후 가장 높은 일조량을 기록했다. 이후 뜨겁고 건조한 여름을 맞았는데, 볼랭저가 그랑 크뤼와 프리미에 크뤼 포도밭의 포도만 사용한다는 점이 이런 조건에서는 더욱 강점으로 작용했다. 그랑 크뤼로 갈수록 포도밭은 순수한 석회의 비율이 높은 토양이라 건조한 시기에도 수분 부족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적당한 스트레스를 겪은 포도나무에서 건강한 포도를 생산할 수 있었고, 9월 4일부터 수확을 시작했다. 평균 잠재 알코올은 10.5%였다. 포도 숙성도에 차이가 있어 수확은 평소보다 조금 더 오래 걸렸고, 기후의 영향으로 신선함을 추구하기 위해 세심함과 노하우가 필요했던 빈티지다.

라 그랑 아네(La Grande Année) 2015는 60%의 피노 누아와 40%의 샤르도네를 사용했다. 피노 누아는 주로 베르즈네(Verzenay)와 아이(Aÿ), 마뢰이-쉬르-아이(Mareuil-sur-Aÿ)에서 생산했고, 샤르도네는 슈이(Chouilly)와 아비즈(Avize)에서 생산했다. 100% 배럴에서 양조했고 도사주는 리터당 8g이다. 황금빛 컬러에 브리오슈, 사과, 자두, 라즈베리, 체리, 젖은 돌, 허브 등의 향이 어우러지고 바닐라와 꿀 향도 은은하게 느껴진다. 풍부하고 부드러운 질감에 산미와 복합미, 미네랄 뉘앙스가 훌륭하다. 무게감과 우아함을 갖춘 샴페인이다.
라 그랑 아네 로제(La Grande Année Rosé) 2015는 62%의 피노 누아와 38%의 샤르도네를 사용했고, 아이 지역 외곽의 가파른 언덕에 위치한 라 꼬뜨 오 앙팡(La Côte aux Enfants)에서 생산한 레드 와인을 5% 블렌딩해 특별한 로제 샴페인을 완성했다. 역시 배럴에서 양조했고 7년 숙성했다. 볼랭저에서는 도사주를 블라인드로 진행해 가장 맛있는 것으로 결정한다. 그렇게 나온 도사주가 로제의 경우 리터당 7g이다. 딸기, 체리, 라즈베리, 레드커런트 등 풍부한 아로마가 피어나고, 오렌지 껍질의 향도 느껴진다. 입안을 채우는 바디감과 훌륭한 산미, 복합미가 돋보인다. 역시나 우아하면서도 진중하고 감각적인 볼랭저 스타일이다.
2015년은 자연이 준 조건 안에서 균형을 만들어낸 볼랭저의 노하우가 빛난 해다. 앞으로도 이례적인 기후는 반복될 테니, 생산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노력하고 있다. 볼랭저는 지속가능성을 우선순위에 두고 1, 2년의 계획이 아니라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변화에 대처한다. 2023년 10월에는 환경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과 역할을 평가하는 비콥(B Corp) 인증을 받았고, 지속적으로 CSR을 강화하고 있다. 샹파뉴의 기후조건에서 친환경 재배를 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재배자들과 함께 유기농을 향한 노력도 계속하며 100% 지속가능성과 유기농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다. 캐노피로 초대해 숲의 정취를 선사하고 명상을 이끄는 라 그랑 아네 2015 같은 샴페인은 이런 비전 안에서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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