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와인의 색깔만 바라보아도 향기가 느껴질 때가 있다. 색깔이 향기를 건네는 순간에는 그 아름다움이 더욱 풍성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보랏빛이 맴도는 와인잔을 가볍게 흔들면 바이올렛이 점차 모습을 드러낸다. 동틀 무렵 고목이 빼곡하게 들어선 숲의 가장자리에서 낮게 피어난 꽃을 마주한다. 새벽 이슬이 자취를 감추면 생명의 기운이 깃든 이파리 위로 짙은 분내가 퍼져나간다. 빛의 파장을 가진 향기, 바이올렛이다.
바이올렛은 아이리스와 함께 조향계를 대표하는 파우더리 플로랄(Powdery Floral)로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꽃향기라면 로즈 플로랄(Rose floral)의 장미나 화이트 플로랄(White floral)의 재스민을 떠올린다. 이들의 향기는 감미로움과 우아함을 모두 갖추고 있는 플로랄의 전형이다. 하지만 바이올렛은 다른 방향성을 갖는다. 가장 명확한 특징은 분가루에서 느껴지는 파우더리한 텍스처다.
천연 향료로 존재하는 파우더리 플로랄 계열 원료들은 꽃잎을 통해 추출하지 않는다. 아이리스는 2~3년 숙성된 구근을 추출하고, 바이올렛은 진한 녹색을 띠는 이파리를 사용한다. 바이올렛이 주로 재배되는 곳은 이집트의 델타 지구다. 나일강이 만들어 낸 이 삼각지는 지구상에서 가장 비옥한 토양과 바이올렛 재배에 적합한 따뜻한 기후를 갖추고 있다. 바이올렛의 이파리는 1년에 총 4번 수확되며 휘발성 용매 추출법을 통해 바이올렛 리프 앱솔루트(Violet leaf absolute)로 거듭난다. 원료를 묻힌 시향지에서는 물기를 머금은 풀내음을 시작으로 농익은 레드베리나 검은 자두의 프루티 노트가 퍼져 나가고, 무게감 있는 나무와 텁텁한 가죽의 냄새가 깊게 깔린다. 보라색을 향기로 음미할 수 있다면 분명 이와 같을 것이다. 바이올렛은 예로부터 로즈 노트와 함께 사용돼 왔다. 화려한 장미와 풍성한 파우더리함은 서로 심미적인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또한 아이리스나 헬리오트로프와 같은 동류의 노트들과 함께 파우더리 플로랄 부케의 주인공을 맡기도 했다.
매번 바이올렛 리프 앱솔루트를 직접적으로 사용해 향을 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이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가격을 고려하는 것은 조향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와 같은 고가의 원료는 매우 소수의 작업에만 사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렴하면서 천연물의 특징을 모방할 수 있게 해주는 합성 향료 덕분에 조향사들은 다양한 향기를 구사할 수 있다. 파우더리 플로랄 계열의 향기를 내는 분자는 바로 아이오논(Ionone)류 성분들이다. 그 중에서도 알파-아이오논(Alpha-ionone)과 베타-아이오논(Beta-ionone)이 핵심이다. 전자는 보다 프루티한 뉘앙스를 담당한다면, 후자는 시간과 함께 짙어져 가는 나무향이 돋보인다. 하지만 다른 파우더리 플로랄들과 차별화되는 바이올렛만의 향기는 MOC(Methyl Octine Carbonate)를 통해 완성된다. 이는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지만 매우 소량으로도 두터운 잎의 느낌을 가장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는 원료이기 때문에 바이올렛 어코드에서는 빠지지 않고 사용된다.
와인에서도 바이올렛의 향기를 느끼게 해주는 것은 역시 아이오논류 성분들이다. 이들은 주로 시라나 카베르네 소비뇽, 산지오베제, 네비올로와 같은 껍질이 상대적으로 두꺼운 레드 품종에서 찾아볼 수 있다. 포도 껍질에는 베타-이오논의 전구체 역할을 하는 색소 물질인 베타-카로틴이 풍부하기 때문에 이러한 품종의 포도들은 발효와 침용 과정에서 바이올렛 아로마를 품게 된다. 또한 포도 껍질과의 접촉 시간이 길어질수록 베타-이오논의 생성량이 증가하므로 양조 방식이 향기의 발현에 큰 영향을 미친다. 껍질을 제거해 생산하는 화이트 와인에서 바이올렛의 향취를 느낄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와인이 빚어지면서 색을 내는 물질이 향을 내는 물질로 다시 태어난 셈이다.
바이올렛의 향기가 돋보이는 향수와 와인
바이올렛은 조향계에서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온 대표적인 파우더리 플로랄 노트다. 특유의 향기 덕분에 로즈와 같은 플로랄 뿐 아니라 우디나 레더 노트와 함께 조합되는 등 계열을 가리지 않는 면모가 있다. 바이올렛의 색감과 질감을 품은 향기들을 소개한다.
1906년 출시된 아프레 롱데(Après L'Ondée)는 겔랑의 숨은 명작이다. 가문의 황금 시대를 열었던 자끄 겔랑(Jacques Guerlain)은 향수의 이름 그대로 소나기가 지나간 뒤 느껴지는 정취를 고스란히 향기로 구현해냈다. 옅은 시트러스 노트를 배경으로 아니스의 상쾌함과 블랙커런트의 짙은 풀잎향이 피어난다. 바이올렛을 필두로 아이리스와 헬리오트로프, 미모사로 이어지는 파우더리 플로랄의 향연은 아직 걷히지 않은 부드러운 질감의 구름을 형상화한다. 포근함을 이어받은 바닐라와 샌달우드, 그리고 송진 노트는 머스크 속으로 빠져들며 잔잔한 결말을 맺는다.
국내 시향자들에게도 큰 인기를 누려온 플라워 바이 겐조(Flower by Kenzo) 또한 바이올렛의 매력을 즐길 수 있는 향수다. 향수병에 새겨진 여리한 코클리코 때문에 가볍고 투명한 꽃의 향기를 낼 것이라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고혹한 파우더리함으로 명성을 드높인 향수다. 서로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로즈와 바이올렛에 바닐라와 머스크가 가미되며 부드러운 조화를 이룬다. 2000년에 출시된 이 향수는 조향계의 거장 알베르토 모리야스(Alberto Morillas)가 전쟁으로 점철된 20세기에게 고하는 작별인사이자 새로운 시대를 향한 평화의 바람이다.
마지막 향수는 샤넬 향수의 DNA를 가진 조향사 모리스 루셀이 2008년 조향한 프레데릭 말의 덩 떼 브라(Dans tes bras)다. 그는 샤넬의 2대 전속 조향사인 앙리 호베르(Henri Robert)의 밑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모리스 루셀의 향기에서는 샤넬의 모더니티가 느껴지는 듯하다. 바이올렛을 가장 미니멀하게 표현한 이 향수 또한 그의 스타일을 반영하고 있다. 바이올렛과 헬리오트로프가 그려내는 보라색 배경의 그림 속에서 니트 속 따스한 살냄새를 닮은 머스크 원료 캐시메란(Cashmeran)이 파우더리한 질감을 극대화시킨다.

[(왼쪽부터) 스카르파 바롤로 '테티모라', 클로나킬라 쉬라즈 비오니에, 스톤스트릿 에스테이트 카베르네 소비뇽]
이번에 소개하는 와인에서는 눈과 코를 모두 활용해 바이올렛을 감상할 수 있다. 첫 번째 와인은 스카르파 바롤로 '테티모라'(Scarpa, Barolo 'Tettimorra')다.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역을 대표하는 네비올로 품종의 이 와인은 오크통에서 23일 동안 껍질과 함께 침용 과정을 거친다. 알코올 발효 및 말로락틱 발효가 끝난 후 프랑스산 오크통에서 29개월 간 숙성된다. 두꺼운 껍질에서 비치는 색깔과 양조 과정에서부터 이미 바이올렛의 향기를 짐작할 수 있다. 감초와 레드베리가 곁들여진 섬세한 아로마와 탄탄한 바디감이 붉은 육고기와 아름다운 마리아주를 이룬다.
두 번째 와인은 클로나킬라 쉬라즈 비오니에(Clonakilla, Shiraz Viognier)다. 클로나킬라는 가족 경영 방식으로 운영되는 호주의 작은 와이너리다. 이들이 대륙성 기후의 캔버라 디스트릭트에서 쉬라즈와 비오니에 품종으로 탄생시키는 와인은 마치 북부 론 지방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이번 와인에도 두 품종이 함께 사용됐다. 강렬한 블랙 페퍼와 석류 너머로 장미의 플로랄이 묻어나는 바이올렛의 아로마, 그리고 후반부를 장식하는 오크향이 마치 하나의 향수처럼 다가온다. 섬세한 타닌과 산미의 조화가 매력적이고 세련된 피니시가 길게 유지된다.
마지막 와인은 스톤스트릿 에스테이트 카베르네 소비뇽(Stonestreet Estate Cabernet Sauvignon)이다. 2017년 미국에서 열린 한미 정상의 만찬에 등장한 일화로도 유명한 와인이다. 뉴 프렌치 오크에서 20개월 가까이 숙성해 농익은 블랙베리와 블랙커런트, 바이올렛의 아로마를 풍성하게 표현한다. 코르크 마개를 오픈하는 순간부터 잔을 비우는 순간까지 풍미와 구조감이 계속해서 깊어진다. 캘리포니아 화산토에서 나오는 미네랄리티와 뛰어난 밸런스, 그리고 긴 피니시를 통해 카베르네 소비뇽의 매력을 한껏 뽐낸다.
햇살은 여전히 뜨겁지만 절기가 바뀌면서 바람의 방향 또한 달라진 듯하다. 가을은 곧 사색의 계절이라고 했던가. 사색이 바이올렛의 꽃말 중 하나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와인잔을 들어 올리며 그 안에서 보라빛 색깔과 향기를 탐닉할 계절이 도래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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