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조향사의 와인 노트] 원초적 감각을 일깨우는 향기, 레더


가죽은 동물의 몸에서 벗겨 낸 껍질을 가공해서 만든 물건을 의미한다. 태곳적부터 인간은 가죽을 몸에 두르며 살아왔다. 이것을 가공하는 일은 성스러운 의식과도 같다. 죽은 생물에 시간과 정성을 쏟아붓고 그 갗을 기려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도록 만드는 행위이니 말이다. 자칫 잔혹하게 들릴 수 있는 이 숭고한 단어에는 거스를 수 없는 향기가 묻어난다.


시트러스, 플로랄, 우디, 시프르(Chypre), 후제르(Fougère), 오리엔탈(Oriental) 그리고 마지막 향수 계열인 레더(leather). 1984년 프랑스 조향사 협회(Société française des Parfumeurs)는 지난 200여 년 간 출시된 향수들을 연구해 최초의 향수 분류 체계를 고안해 냈다. 업계 전문가들과 대중 사이의 소통을 위해 제작된 이 도구는 향수를 7가지 계열로 구분분하고 있다. 결국 앞서 언급된 계열들은 당대의 표준으로 자리잡을 만큼 선명한 대표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세기가 바뀐 현재의 관점에서 낯설게 다가오는 이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중 레더 계열이 특히 그러하다. 백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향수 시장의 주역으로 활약했던 레더 계열은 우리의 후각 팔레트 안에서 점차 잊혀지고 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다. 오늘날의 향수 판매대에는 다양하게 해석된 플로랄 노트나 구르망 노트의 향연이 펼쳐진다.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렇다면 레더 계열은 영영 그리움의 대상으로 남을까. 이 문제의 답은 굳이 향수까지 가지 않아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와인의 노즈에서부터 피니시까지 향기로운 여정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는 레더리한 아로마는 우리의 원초적 감각을 다시금 일깨워 준다.


레더는 그 무엇보다도 생물, 그것도 동물과 연관이 깊은 단어처럼 들린다. 하지만 조향계에서 탄생하는 레더 노트에는 어떠한 동물의 가죽도 사용되지 않는다. 레더와 같은 이차 가공물은 원물의 특징을 통일하기도 힘들 뿐더러 만드는 과정에 따라 가지각색의 제품이 나오기 때문에 품질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을 중시하는 조향계에서는 기피될 수 밖에 없는 원료다. 레더 노트는 20세기가 되어서야 아이소 부틸 키놀레인(Iso Butyl Quinoline)이라는 매우 인공적인 합성 향료의 개발을 기점으로 전성기를 맞게 된다. 젖은 숲과 나무의 뿌리를 떠올리고 옅은 스파이시함과 흙내음을 가진 이 원료는 가죽의 표면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향기를 가장 잘 표현하는 원료로 알려져있다. 아이소 부틸 키놀레인은 건초를 닮은 아로마틱 노트의 클레리 세이지(Clary sage), 깊은 색감과 둥근 볼륨감을 채워줄 수 있는 플로랄 노트의 페닐 아세탈데하이드(Phenyl acetaldehyde), 탄 나무의 향을 내는 버치 타르(Birch Tar), 육감적인 동물의 냄새를 더하는 카스토레움(Castoreum) 등과 합을 맞추며 클래식한 레더 어코드를 완성한다. 표피의 향기가 가장 화학적인 원료를 주축으로 만들어지는 셈이다.


그러나 와인 안에서 레더 아로마를 내는 주체는 또 다른 이들이다. 와인에서의 가죽향은 페놀류 화합물이 분해되면서 생성된다. 오크통에 존재하는 리그닌(Lignin)과 포도 껍질에 함유된 타닌(Tannin)이 대표적인 페놀류 화합물들이다. 물론 이 분자들은 바디감에 기여하는 성분이지만 향을 내는 방향족 화합물이기 때문에 아로마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레더 아로마를 발현시키는 포도 품종으로는 보르도의 주품종인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과 메를로(Merlot), 스페인의 템프라니요(Tempranillo), 이탈리아의 네비올로(Nebbiolo)가 주로 언급된다. 양조 과정에서 이들의 껍질이 품고 있는 성분이 충분히 추출되어 나온 후 오크통 안에서의 장기 숙성을 통해 화학적 변화라는 무두질을 거치면 고혹한 가죽의 향기로 재탄생하게 된다.


레더의 향기가 돋보이는 향수와 와인

레더는 클래식 향수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중요한 계열이다. 20세기를 수놓은 레더 계열의 명작들은 아직까지도 여러 조향사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겹겹이 쌓인 시간의 아름다움을 전하는 향수들을 소개한다.


1924년 출시된 뀌르 드 뤼시(Cuir de Russie)는 샤넬 No.5를 조향한 에르네스트 보(Ernest Beaux)의 정체성이 고스란히 반영된 향수다. 1920년대 파리는 러시아산 가죽의 향기로 물들어 있었다. 혁명을 피해 프랑스로 떠나온 러시아인들은 고국에서 가져온 가죽 제품을 매우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피난민 중 한 명이었던 에르네스트 보 역시 그러했다. 애절한 향수(鄕愁)가 담겨 있는 뀌르 드 뤼시는 클레리 세이지부터 볼륨감 있는 플로랄 노트, 탄 나무향이 깃든 가죽향으로 이어지는 레더 노트의 교과서와 같은 클래식 향수다.


황금 토바코를 의미하는 타바 블롱(Tabac Blond)은 카롱(Caron)의 전속 조향사였던 에르네스트 달트로프(Ernest Daltroff)의 대표작이자 브랜드의 명성을 세운 일등공신이다. 사실 조향계에서 레더 노트와 토바코 노트는 구성적으로 높은 유사성을 보이기 때문에 함께 사용되거나 동시에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타바 블롱에서는 가죽의 우아하고 관능적인 향기가 스파이시한 로즈 플로랄인 카네이션과 마리아주를 이루며 빛나는 고급 시가의 모습을 그려낸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향수는 1981년 출시된 샤넬의 안테우스(Antaeus)이다. 브랜드의 전속 조향사였던 자끄 폴쥬(Jacques Polge)는 주로 여성 향수에서 등장하는 계열인 레더 시프르를 아로마틱 노트를 통해 마치 후제르인 듯 남성스럽게 해석해 냈다. 남성성과 여성성, 그리고 관능적인 카스토레움으로 강조되는 레더 노트가 완성하는 트라이앵글은 향기의 미학을 뛰어넘어 철학의 영역을 비춘다.


[(왼쪽부터) 쿠네 임페리얼 리제르바, 프로두또리 델 바르바레스코 바르바레스코, 도멘 샤르통 머큐리 샤피트르]


레더 아로마가 돋보이는 첫 번째 와인은 쿠네 임페리얼 리제르바(Cune Imperial Reserva)다. 스페인 리오하 지방의 주품종인 템프라니요가 85%로 가장 많이 사용됐고, 그라시아노(Graciano)와 마주엘로(Mazuelo), 가르나차(Garnacha)가 블렌딩되었다. 쿠네 와인들의 라벨에 그려진 스페인 국기는 '국가를 대표하는 와이너리'라는 자부심을 보여준다. 쿠네는 포도송이의 손상을 최소화하기 위해 모두 손으로 수확한 후 양조장까지 냉장 트럭을 통해 운반한다. 토착 효모로 알코올 발효된 와인은 프랑스와 미국산 오크통에서 24개월 이상 숙성된다. 강렬한 루비빛을 내는 와인을 잔에 따르면 로즈마리의 산뜻함이 곁들여진 레드 베리류의 아로마가 색감과 발을 맞춘다. 입안에서는 감초를 흩뿌린 스모키한 우디와 발사믹 노트가 깊은 가죽향에 감싸여 전해지고, 부드러운 타닌이 더해지면서 훌륭한 구조감을 완성한다.


두 번째 와인은 프로두또리 델 바르바레스코, 바르바레스코(Produttori del Barbaresco, Barbaresco)다. 바롤로(Barolo)와 함께 피에몬테(Piemonte) 지방의 쌍두마차를 이루는 바르바레스코는 네비올로 100%의 와인을 선보인다. 프로두또리 델 바르바레스코는 세계적인 와인평론가 로버트 파커가 가장 높은 수준의 와인 양조를 이어오는 협동조합이라 평했을 정도로 클래식한 스타일의 훌륭한 와인을 생산한다. 풍성하게 전해지는 체리와 자두, 크렌베리의 프루티 노트는 정향 스파이시 노트를 거쳐 레더리한 뉘앙스로 연결된다. 이미 산미와 타닌이 이루는 섬세한 조화를 충분히 즐길 수 있지만 긴 숙성을 통해 풍미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와인이다.


가죽향의 매력은 도멘 샤르통, 머큐리 샤피트르(Domaine Charton, Mercurey Chapitre)와 같이 피노 누아 100%의 부르고뉴 와인에서도 느낄 수 있다. 40살이 넘은 나무에서 손 수확한 포도를 전통적인 방식으로 양조한 후 10개월간 오크통에서 숙성했다. 노즈에서는 검붉은 체리와 딸기의 과실향과 함께 젖은 낙엽과 흙내음이 전해진다. 섬세한 오크 숙성을 통해 만들어지는 스파이시한 바닐라와 부드러운 레더의 아로마가 복합미를 더한다.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초겨울에는 옷장 안에 잠들어 있던 가죽 자켓을 꺼내 걸치고 레더 노트의 향수를 뿌리게 된다. 이제 몸과 마음을 모두 가죽의 향기로 적시는 데까지 단 한 발자국만이 남았다. 목넘김 후에도 입안을 맴돌며 향기와 색깔, 그리고 질감을 전하는 그 마지막 조각, 와인 속의 레더 아로마.

프로필이미지김태형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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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24.10.31 08:00수정 2025.05.15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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