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조향사의 와인 노트] 따스함이 깃드는 향기, 바닐라

소한(小寒)이 지났다. 매서운 바람이 사그라들고 새순이 돋아날 날이 멀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다시 눈이 오길 기다린다. 눈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온다. 우산도 없이 길을 걷는다거나 문득 창밖을 응시하는 중 우연히 마주하는 식이다. 그것이 기다려지는 이유가 비단 낭만에 젖은 감상 때문만은 아니다. 고유한 속도로 낙하하는 눈송이를 올려다볼 때면, 혹은 건물이나 나무 위로 소복이 쌓여가는 하얀 눈뭉치를 바라볼 때면 그것이 가진 본질적인 물성과는 다른 따스함이 스며든다. 눈은 색감과 질감, 형상의 모든 부분에서 바닐라와 닮은 향기의 온도를 낸다. 부드럽고 감미로운 바닐라, 내가 눈이 오길 기다리는 이유다.



바닐라는 어떻게 해서 우리 곁에 오게 된 것일까. 이 고혹한 향기를 지닌 식물의 이야기는 중앙 아메리카에서 시작된다. 멕시코의 치아파스(Chiapas) 지방에 분포된 열대 우림이 바닐라의 본고장이다.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바닐라는 외부의 도움 없이 생식 활동을 할 수 없는 식물이다. 바닐라꽃의 수술과 암술 사이에는 필름과 같은 막이 형성돼 있어 자연적으로는 수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매혹적인 향기에 이끌린 작은 새나 곤충이 그 필름을 찢어줄 때 비로소 새 생명을 향한 길이 열리게 된다. 고대 마야인들과 아즈텍인들은 바닐라 꽃을 인공 수정해 재배하고 가공하는 기술을 전승했으며 초콜릿을 비롯한 다양한 음식에 향신료처럼 곁들였다고 한다. 이처럼 바닐라는 기원전부터 인류가 재배하기 시작한 식물이었지만 독특한 생식 구조로 인해 인공 수정 방법이 널리 알려지기 전까지는 중앙 아메리카의 특산물로 여겨졌다. 


바닐라의 향기는 우리의 코에 도달하기까지 독특한 과정을 거친다. 갓 수확된 바닐라 깍지는 익지 않은 바나나처럼 녹색을 띠며 그것이 풍기는 향기 또한 아직 충분히 바닐라답지 못하다. 이 천연물을 푹 쪄낸 후 양지와 그늘을 오가며 오랜 시간 숙성시키면 짧은 나뭇가지를 닮은 갈색 막대기가 만들어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닐라의 모습이 바로 이것이다. 만약 고대인들이 바닐라 수정의 비밀을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아즈텍을 정복한 코르테스(Cortés)가 바닐라를 유럽에 도입하지 않았더라면, 또 기술이 충분히 발전하지 못해 온전한 바닐라의 향기를 추출하지 못하였더라면 우리는 신의 선물과 같은 바닐라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유럽인들이 바닐라를 접한 것은 스페인의 정복자 코르테스가 멕시코에 다다른 이후다. 바닐라가 전하는 달콤한 유혹에 매료된 코르테스는 16세기 바닐라를 스페인에 도입했으며, 이것이 프랑스에 알려진 것은 그로부터 100년이 더 지난 후의 일이었다. 바닐라는 유럽 전역에서 음식의 풍미를 한층 더 감미롭게 해주는 향신료로 매우 큰 인기를 끌었다. 아름다운 향기를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궁전을 온갖 향으로 물들였던 프랑스의 왕 루이 15세 역시 자신의 정원에 바닐라를 심었다고 한다. 허나 아직까지 천연물만으로 이 향기를 구현해야 했다면 바닐라를 음식이나 향수에서 지금처럼 쉽게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나 인도양의 레위니옹 제도와 같은 식민지에 바닐라를 재배했다 하더라도 바닐라의 공급량은 언제나 그 수요를 뛰어넘지 못했다. 여전히 바닐라가 사프란과 함께 세상에서 가장 비싼 향신료라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바닐라가 오늘날 가장 만연한 향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합성 향료 덕분이다.


유럽인들이 코르테스의 등장 이전에 바닐라의 향기를 한번도 맡아보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이들은 빵과 디저트에서 설탕이 주는 것과는 다른 달콤한 향기가 난다는 사실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바닐라는 천연물이며 그것의 추출물 또한 단일 성분이 아닌 합성물이다. 그 말인즉슨 다른 천연 향료들과 마찬가지로 바닐라 익스트랙트(Vanilla extract) 안에도 수십, 수백여 가지의 성분들이 뒤섞여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바닐라의 향기를 바닐라답게 만들어주는 성분은 무엇일까. 1858년 프랑스의 화학자 니꼴라스-떼오도르 고블레(Nicolas-Théodore Gobley)는 바닐라 깍지를 증발건조시키며 그 안에 함유된 향기 성분을 결정화하는데 성공했다. 이 고운 가루 형태의 물질은 바닐라의 달콤한 향기와 따뜻하고 파우더리한 뉘앙스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으며, 클로브와 같은 스파이시함을 전하기도 했다. 니꼴라스-떼오도르는 자신이 최초로 분리 추출에 성공한 이 성분을 바닐린(Vanillin)으로 명명했다.


와인에서 바닐라 아로마를 내는 주요 성분 또한 바닐린이다. 바닐린은 와인의 오크통 숙성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생성된다. 오크통에는 식물의 세포벽을 구성하는 리그닌(Lignin)이라는 성분이 높은 함량으로 포함돼 있는데, 와인을 오크통에 숙성시키는 동안 리그닌이 분해되면서 바닐린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생성된 바닐린은 와인에 스며들어 바닐라 노트를 낼 뿐 아니라 크리미한 프루티 노트나 따뜻한 우디 노트, 강렬한 스파이시 노트와 조화를 이루며 복합적인 아로마를 더한다. 결국 바닐린의 유무와 함량은 오크통의 종류, 토스트 정도, 숙성 기간 등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바닐라 아로마는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 모두에서 나타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오크 숙성을 많이 하는 레드 와인에서 두드러진다. 하지만 오크 숙성을 거친 샤르도네나 소비뇽 블랑에서도 바닐라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바닐라의 향기가 돋보이는 향수와 와인

부드럽고, 따뜻하며, 달콤하다. 바닐라를 묘사하는 가장 명료한 표현들이다. 이는 바닐라 노트를 지닌 향수와 와인을 묘사할 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러한 바닐라의 매력이 가장 아름답게 녹아든 향수를 소개한다.


인류가 바닐라의 향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된 것은 바닐린의 발견 이후다. 하지만 조향계에서는 이 합성 향료가 최초로 사용된 겔랑(Guerlain)의 지키(Jicky)로부터 바닐라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1889년 출시된 이 향수는 최초의 추상 향수로도 알려져 있다. 이는 자연물이 아닌 감정과 같은 관념적인 주제를 향으로 표현한 향수를 의미한다. 조향사 에메 겔랑(Aimé Guerlain)은 지키 안에서 사무치는 파우더리함을 전하는 바닐라 노트를 통해 첫사랑과의 추억을 그려냈다.


에메 겔랑의 뒤를 이은 자끄 겔랑(Jacques Guerlain)은 겔랑 브랜드의 황금 시대를 이룩한 조향사로 평가받는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작품은 1925년 출시된 그의 대표작 샬리마(Shalimar)다. 무굴 제국의 황제 샤 자한(Shah Jahan)이 타지 마할(Taj Mahal)과 사랑을 나누던 비밀 정원의 이름을 차용한 이 향수는 오리엔탈 계열의 시초로 알려져 있다. 또한 바닐린보다 향 세기가 강하고 구르망한 뉘앙스가 두드러지는 에틸 바닐린(Ethyl vanillin)을 최초로 사용하며 바닐라 노트를 강조했다. 베이스 노트에서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바닐라와 통카 빈, 파출리, 샌달우드는 도입부에서 강렬한 상쾌함을 내뿜는 베르가못과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2017년 출시된 뮤글러의 아우라는 초록빛 바닐라를 선보인다. 올리비에 크레스프(Olivier Cresp)를 필두로 국제 향료 회사 피르메니쉬(Firmenich)의 여러 조향사들이 참여한 이 작품은 바닐라를 세련된 그린 노트와 연결시켰다. 잘린 풀잎에서 전해오는 산뜻함과 쌉싸름한 루바브(Rhubarb)는 달콤한 향기를 배가시키는 마법의 조미료다. 그린 노트의 바람을 타고 풍성한 화이트 플로럴의 향기를 가득 실은 배가 도달한 바닐라의 섬에서는 클래식과 모더니즘의 전이가 펼쳐진다.


(왼쪽부터) 루이 자도 뿌이 퓌세, 샤토 생 미셸 인디언 웰스 카베르네 소비뇽, 샤토 드 페즈


바닐라의 따뜻함이 감도는 와인들을 소개한다. 바닐라의 향기를 꼭 레드 와인에서만 찾으라는 법은 없다. 루이 자도 뿌이 퓌세(Louis Jadot Pouilly-Fuisse)는 마콩 남쪽의 베르지송과 솔뤼트레 인근, 점토-석회질 토양의 가파른 경사면에 위치한 뿌이 퓌세 포도밭에서 생산된다. 오크 숙성된 부르고뉴 샤르도네의 순수한 매력을 보여주는 이 와인은 노즈에서 레몬 제스트와 신선한 붉은 사과, 꿀을 머금은 화이트 플로랄을 드러낸다. 입안에서는 구운 견과류와 바닐라의 아로마가 곁들여지며 풍부한 미네랄리티와 균형 잡힌 산도가 긴 여운 속에서 이어진다.


미국 와이너리들이 시장의 주류로 떠오른 것이 더 이상 근래의 일이 아님에도 워싱턴 와인은 현지에서의 위상과 품질에 비해 주목도가 조금은 아쉬운 듯하다. 그렇기에 더더욱 매대에서 워싱턴 와인을 마주하는 날이면 반가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콜롬비아 밸리에 자리한 샤토 생 미셸은 워싱턴에서 가장 오래된 와이너리다. 샤토 생 미셸 인디언 웰스 카베르네 소비뇽(Chateau Ste Michelle Indian Wells Cabernet Sauvignon)은 워싱턴 특유의 낮은 강수량과 높은 일교차 덕분에 자연스러운 산도를 유지하며, 짙은 블랙베리와 블랙 체리의 풍부한 과일 향과 묵직한 바디감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와인이다. 24개월의 오크 숙성을 통해 바닐라 아로마와 부드러운 타닌감이 더해져 더욱 깊어진 풍미를 선보인다.


이제 다시 프랑스로 떠나보자. 15세기에 설립된 샤토 드 페즈 역시 보르도 좌안의 생떼스테프에서 가장 오래된 와이너리다. 샤토 드 페즈(Château de Pez)는 벨벳처럼 부드러운 텍스처와 훌륭한 밸런스를 보여주는 풀바디 와인으로 라즈베리의 상큼한 과실향으로 시작된 아로마는 아이리스와 삼나무를 거쳐 코코아, 그리고 바닐라로 이어진다. 마지막까지 입안에 감도는 매력적인 바닐라 노트는 오크통에 심혈을 기울이는 샤토 드 페즈의 노력에 기인한다. 발효 과정을 거친 와인은 12월부터 오크통에서 숙성된다. 와인은 빈티지에 따라 뉴 캐스크, '프리미에 뱅' 캐스크, '듀지엠 뱅' 캐스크에 저장되며 3개월마다 랙킹된다. 여과되지 않은 채 오크통의 영혼을 입은 와인은 마침내 바닐라의 온도를 품게 된다.


봄으로 향하고 있는 지금 나는 아직 눈이 오길 기다린다. 향수 속에서, 또 와인 속에서 함박눈처럼 다가올 바닐라를 기다린다. 지난주 맛본 와인에서 따뜻함이 묻어난 것으로 보아 머지 않아 눈이 내릴 모양이다. 당신의 와인 잔에도 바닐라의 향기가 소복이 쌓이길 기대한다.

프로필이미지김태형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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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25.01.21 13:46수정 2025.05.1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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