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겐 너무 아름다운 너의 밤을 지켜주겠어…'
해변의 끝자락에 다다르며 아련히 부서지는 파도소리. 손때 묻은 MP3 플레이어에 이어폰 플러그를 꽂아 넣고 재생 버튼을 누른다. 작은 구멍 사이로 코나의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가 흘러나온다. 이 노래가 실린 플레이리스트는 일정한 주기를 돌며 잠들었다 깨어나기를 반복해왔다. 음악을 감상하는 내내 소매 끝이 윗팔뚝 위로 살랑거린다. 그 계절로 향하는 모양이다.
어떠한 수치를 연속된 물리량으로 나타내는 일을 아날로그라 부른다. 나는 아날로그 방식을 선호한다. 무선 이어폰을 사용하지 않는 것 또한 그러한 이유에서다. 여름은 지극히 아날로그의 계절이다. 뜨거운 열기와 그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모두 우리의 실체적인 감각을 자극한다. 이를 모두 관통하는 향기가 있다. 녹색 감성을 자아내는 아로마틱 노트다.
'아로마틱(aromatic)'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향기를 내는'이라는 뜻이지만, 향을 다루는 조향계에서는 사뭇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아로마틱 노트는 로즈마리, 타임, 라벤더, 민트, 세이지 등 신선한 허브에서 유래한 향조로, 상쾌하거나 쌉싸름한 느낌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은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산림에서 느껴지는 청량한 바람에 빗댈 수 있겠다. 허나 이들의 향기가 코끝에 스칠 때 피부로 전해지는 물리적 감각을 느끼지 못했다면, 아직 아로마틱 노트를 깊이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아로마틱 노트를 접하기 위해 굳이 값비싼 향수를 탐할 필요는 없다. 내 생각으론 향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가장 정통적인 방식은 자연을 향유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것을 담고 있는 와인을 즐기는 것이다. 당신의 여름밤을 아름답게 빛내줄 아로마틱한 품종들과 그 매력을 고스란히 발산하는 와인들을 소개한다.

베르데호
알토, 오시앙 Aalto, Ossian
베르데호(Verdejo)의 역사는 11세기 스페인 루에다(Rueda) 지역의 두에로(Duero)강 유역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수도원을 중심으로 베르데호를 재배하는 포도밭이 등장하며 수 세기 동안 이 지역의 주요 품종으로 자리 잡았다. 20세기 초 전세계를 휩쓴 필록세라의 영향으로 멸종 위기에 처한 적도 있지만, 1980년 루에다가 스페인의 원산지 명칭 등급(D.O.)으로 지정되면서 두 번째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베르데호가 표현하는 아로마의 가장 큰 특징은 상쾌한 라임과 레몬, 입 안에서 전해지는 아몬드와 바닐라, 그리고 아로마틱한 펜넬이다.
놀라운 균형감과 넘치는 농축미를 갖춘 알토 오시앙은 필록세라 피해를 면한 200년 된 올드바인으로부터 수확한 포도로 만든다. 700미터 이상의 고지대인 루에다는 무더운 여름이 길게 이어지는 대륙성 기후와 큰 일교차, 배수가 잘되는 모래 토양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환경은 포도나무가 더 깊이 뿌리내리게 해 복합적인 미네랄리티를 부여하며 베르데호 품종 고유의 특성을 온전히 이끌어낸다. 첫인상으로 허브가 깃든 라임 노트를 건네는 오시앙은 천연 효모를 통해 발효한 베르데호의 매력을 한껏 뽐낸다. 한 모금 머금으면 살구와 복숭아와 같은 크리미한 프루티 노트가 두드러지며, 구운 아몬드와 바닐라의 풍미가 뒤따라온다. 오크통 숙성으로 인해 깊이와 복합성이 더해진 와인으로 마치 부르고뉴 샤르도네를 연상시킨다.

베르멘티노
라 스피네따, 베르멘티노 La Spinetta, Vermentino
베르멘티노(Vermentino)는 지중해의 햇살과 바람을 품은 듯한 상쾌한 허브향이 돋보이는 품종이다. 특히 섬과 해안가에 위치한 포도밭에서 재배되는 이탈리아의 베르멘티노는 토양과 해풍의 영향으로 독특한 미네랄리티가 있으며, 서늘하게 유지되는 발효 과정이 생동감 넘치는 산미와 섬세한 허브 노트를 보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베르멘티노의 가장 큰 강점은 더운 기후와 가뭄을 강인하게 견디며 높은 산도와 신선함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후 변화에 대한 적응력이 매우 뛰어나고, 지중해성 기후뿐 아니라 다양한 지역에서 안정적으로 재배가 가능한 특징 덕분에 최근 들어 각광 받는 품종으로 떠오르고 있다.
라 스피네따 베르멘티노는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테리치올라(Terricciola) 마을에서 생산된다. 혼합 점토와 모래, 해양 퇴적물이 풍부한 이곳의 토양은 베르멘티노에 뛰어난 아로마틱 풍미와 미네랄리티를 부여한다. 남향의 포도밭은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을 받아 포도 품종 고유의 신선함과 복합미를 극대화한다. 노즈에서는 바다 내음을 바탕으로 로즈마리와 타임, 풀잎과 같은 상쾌한 아로마틱 노트가 펼쳐진다. 팔레트에서도 복숭아와 라임 같은 과일 풍미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경쾌한 분위기를 잃지 않는다. 오크 숙성을 거치지 않아 품종과 토양이 형성하는 이국적인 허브향과 순수한 과실미가 충실히 전달된다.

소비뇽
리비오 펠루가, 소비뇽 Livio Felluga, Sauvignon
이탈리아에서는 소비뇽 블랑을 간단히 소비뇽(Sauvignon)이라 부른다. 이 자부심이 느껴지는 명칭법에 걸맞게 이탈리아 소비뇽은 아로마의 복합성과 미네랄리티, 산도에서 다른 나라, 특히 프랑스 루아르나 뉴질랜드의 소비뇽 블랑과 구별되는 특징을 갖는다. 라임으로 시작해 멜론과 복숭아, 쐐기풀과 같은 풀잎향, 그린 페퍼, 화이트 플로럴, 때로는 열대과일까지 매우 다양한 향기가 복합적으로 발현되며 겹겹이 쌓인다. 이탈리아 북부의 독특한 토양인 '폰카(Ponka)'는 석회암과 사암이 교대로 퇴적되어 형성된다. 이러한 토양은 소비뇽에 선명한 미네랄리티와 짭짤한 뉘앙스, 기분 좋은 산미를 부여하며 입 안에 생동감과 긴장감을 더한다.
1956년 설립된 리비오 펠루가는 이탈리아 북부 프리울리 지방의 선구적인 와이너리로, 이들의 와인 역시 바다 밑에서 수천 년에 걸쳐 만들어진 토양에서 재배된다. 이 소비뇽은 레몬과 라임 같은 밝은 시트러스와 백합처럼 상쾌한 꽃향기, 신선한 황도와 멜론 등의 강렬하고 호소력 있는 품종 특유의 향기를 내뿜는다. 레몬 그라스와 세이지의 아로마틱한 실루엣이 서려 있는 산뜻함은 더위에 지친 마음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지비보
피나 타이프 Fina Taif
뮈스까 오브 알렉산드리아(Muscat of Alexandria)라는 명칭으로도 유명한 지비보(Zibibbo)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고대 이집트에서 파생된 품종이다. 높은 함량의 테르펜 성분으로 한 번 맛보면 잊기 힘든 강렬한 향과 여운을 남기는 것이 지비보만의 특징이다. 그 중에서도 리나룰(Linalool)은 아로마틱 노트를 갖추는데 큰 몫을 하는 향기 성분이다. 이 품종은 현재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판텔레리아에서 가장 순수한 형태로 재배되고 있다.
피나 타이프의 지비보는 서부 시칠리아의 언덕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재배된다. 스위트 와인으로 생산되는 여타 지비보와는 달리 이런 드라이 스타일의 지비보는 꽃내음과 상쾌한 산도가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코를 잔에 가까이하면 상큼한 만다린, 살구, 복숭아, 지중해 허브, 그리고 허니서클의 다채로운 아로마가 매력적인 부케를 형성하며 피어난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시작과 대비되는 옅은 소금기가 맴도는 마무리가 이상적인 균형을 이룬다.

토론테스
타피즈 클래식 토론테스 Tapiz Classic Torrontes
토론테스(Torrontes)는 아르헨티나의 대표적인 토착 화이트 포도 품종으로, 앞서 등장한 지비보와 칠레의 적포도 품종인 빠이스(País)의 자연적 교배로 탄생했다. 게뷔르츠트라미너를 떠올리게 할 만큼 강렬한 플로럴 아로마를 자랑하는데, 토론테스는 장미꽃보다 아로마틱한 제라늄에 더 가까운 향기를 낸다. 두 꽃 모두 로즈 플로럴 계열로 분류되지만 장미와 달리 제라늄은 잎과 줄기에서 느껴지는 그린 노트와 허브처럼 상쾌한 인상이 강하다.
타피즈는 아르헨티나에서 기술적으로 가장 발전된 와이너리 중 하나로, 멘도사 지역 최고의 테루아를 소유하고 있다. 이 지역은 해발 1,000미터 이상의 고지대에 위치해 일교차가 크고 포도나무가 강한 햇빛에 노출된다. 이런 조건은 토론테스 품종의 아로마와 산미를 극대화하기에 이상적이다. 타피즈 클래식 토론테스는 라임과 같은 시트러스의 상큼함이 아로마틱한 뉘앙스가 한껏 가미된 제라늄과 발을 맞추며 시작된다. 입안에서는 젖산 전환으로 인한 부드러움과 입체감이 더해지며, 시트러스와 플로럴 노트가 녹아든 긴 피니시가 이어진다.

게뷔르츠트라미너
드라이 리버, 게뷔르츠트라미너 Dry River, Gewurztraminer & 냅스타인 더 인사이더, 게뷔르츠트라미너 Knappstein The Insider, Gewurztraminer
사실 게뷔르츠트라미너(Gewurztraminer)는 허브와 같은 전형적인 아로마틱 노트가 짙은 품종이라 볼 수 없다. 오히려 아름답게 만개한 장미꽃과 그 곁을 맴도는 이국적인 과일향을 떠올리는 편이 알맞다. 허나 아로마틱의 정의를 보다 확장시켜 본다면 게뷔르츠트라미너도 그 향기에 맞닿아 있다는 것을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Gewürz'는 독일어로 향신료를 뜻하는데 조향계에서는 생강이나 코리앤더, 후추와 같은 향기들은 프레시 스파이시 노트로 분류한다. 즉, 이 품종에서 느껴지는 스파이스들은 아로마틱한 상쾌함을 가진 향기라는 의미다. 게뷔르츠트라미너의 숨겨진 향기로 인도할 와인 2종을 선정했다.
드라이 리버가 위치한 마틴보로는 자갈 토양과 건조한 기후로 프랑스 알자스의 콜마르 언덕과 흡사한 면을 갖추고 있다. 덕분에 이 게뷔르츠트라미너는 수준 높은 알자스 와인을 떠올리게 한다. 첫 향으로는 꿀에 절인 과일과 장미꽃 향이 펼쳐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진저와 카르다멈 같은 스파이스와 옅은 허브의 뉘앙스가 곁들여진다. 농축된 아로마와 함께 실키하고 오일리한 질감이 입안을 밀도 있게 감싸고, 목넘김 후에는 약간의 잔당감과 함께 아로마틱한 꽃의 잔향이 긴 여운을 남긴다.
호주에서 생산된 냅스타인 인사이더 게뷔르츠트라미너는 꽃향기와 함께 청량한 감귤류가 두드러지는 향긋한 와인이다. 고도가 높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호주 남부의 클레어 밸리에서는 포도가 서서히 익어가기 때문에 향기 성분이 풍부하고 섬세한 스타일의 와인이 만들어진다. 또한 이른 시기에 수확한 포도를 사용해 높은 산도를 유지하며 더욱 산뜻한 인상을 전한다. 입 안에서는 크리스피한 질감이 느껴지고 미세한 탄산감이 텍스처를 더한다. 여름 저녁 가벼운 마음으로 화이트 와인을 마시며 상쾌한 기분을 느끼기에 제격이다.
여름밤이 깊어갈수록 와인의 향기는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잔을 기울일 때마다 코끝을 스치는 아로마틱 노트들은 시간을 거슬러 그 포도가 자란 테루아의 이야기를 속삭인다. 베르데호의 라임은 스페인 고원의 뜨거운 햇살을, 지비보의 미네랄은 시칠리아 바다의 짠 내음을, 그리고 토론테스의 제라늄은 안데스 산맥의 청량한 바람을. 이제 플레이어의 재생 버튼을 다시 누를 때가 되었다. 아로마틱한 와인 한 잔이 선사하는 이 순간이 우리의 여름밤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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