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책갈피 속 와인 아로마] 돈키호테와 라 만차 와인

* 와인21은 가을의 시작과 함께, 조향사가 안내하는 '문학 작품 속 와인 아로마' 연재를 시작합니다. 첫 번째 칼럼에서는 광활한 라 만차를 배경으로 한 작품 <돈키호테>를 따라가며, 그 땅에서 탄생한 라 만차 와인을 소개합니다.


[출처: 챗GPT 생성 이미지]


한 사내가 있다. 스스로를 돈키호테라 부르는 남자. 낡고 녹슨 갑옷을 자신의 신념이라 믿고, 앙상한 말을 위대한 명마 '로시난테'라 이름 붙였다. 그는 세상의 모든 불의에 맞서겠다며 풍차를 향해 돌진하고, 양떼를 거대한 군대로 착각해 칼을 휘두른다.


이 사내를 바라보면 어떤 감정이 떠오르는가. 현실과 이상의 아득한 간극이 빚어내는 우스꽝스러움에 실소가 터지고,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자신만의 세계에 고독하게 갇힌 모습은 가련함을 자아낸다. 또한 타인에게 고통과 피해를 입히는 그의 망상에는 두려움이 스미기도 한다.


잠시 그에게 향했던 시선을 돌려 오늘날 사람들을 보자. 저마다의 성채 안에서 각자의 '둘시네아(Dulcinea)'를 외치며, '거인'이라 믿는 반대편을 향해 확신의 창을 겨눈다. 스스로를 정의의 편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그 모습, 과연 돈키호테와 얼마나 다를까. 오늘 우리가 마주할 책갈피,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낭만적인 모험담이 아니라, 이 시대의 씁쓸한 자화상이다.


그렇다면 이 광기와 신념의 대서사시는 왜 하필 라 만차(La Mancha)에서 시작되었을까? 어쩌면 이는 돈키호테가 딛고 선 땅의 메마름과 뜨거움이 빚어낸 아지랑이였을지도 모른다. 라 만차는 스페인의 심장부, 마드리드 남쪽 거대한 메세타 고원에 자리한다. '만차(Mancha)'라는 이름이 '물이 없는 땅'을 뜻하는 아랍어에서 유래했듯, 이곳은 극단적인 대륙성 기후의 전형을 보인다. 여름이면 40도를 넘나드는 불타는 열기가 대지를 달구고, 겨울이면 영하로 떨어지는 칼바람이 황야를 할퀸다.


이 혹독함 속에서도 라 만차가 개성 있는 와인을 빚어낼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가장 먼저 해발 600~800미터에 이르는 높은 고도를 꼽을 수 있다. 이 고도는 한낮의 뜨거운 태양으로부터 포도가 지나치게 익지 않도록 지켜주는 방패이자, 해가 지면 서늘한 공기를 내려보내 포도의 산미를 생생하게 보존해 주는 축복이다. 연간 3,000시간이 넘게 내리쬐는 강렬한 햇빛이 포도의 당도를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동안, 서늘한 밤공기는 와인의 뼈대를 이루는 산미를 지켜낸다. 이 극적인 일교차야말로 라 만차 와인이 강렬하면서도 균형을 잃지 않게 하는 첫 번째 이유다.


[출처: 챗GPT 생성 이미지]


땅을 들여다보면 또 하나의 비밀이 드러난다. 표면은 붉은빛을 띤 점토질 모래로 덮여 척박해 보이지만, 그 아래에는 두꺼운 석회암 층이 숨어 있다. 석회암은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이 땅에서 거대한 스펀지처럼 희소한 수분을 머금고 있다가, 가장 건조한 시기에 포도나무 뿌리에 생명수를 공급한다. 포도나무는 이 물을 찾아 필사적으로 땅속 깊이 파고들며, 그 과정에서 토양의 다채로운 미네랄을 흡수한다.


결국 라 만차의 포도는 생존을 위해 투쟁한다. 태양의 열기와 맞서고, 메마른 땅과 씨름하며, 극심한 기온차를 견뎌낸다. 이 모든 고난의 시간이 응축되어, 라 만차 와인은 꾸밈없이 정직하고 강렬한 힘과 땅의 역사를 오롯이 담아낸 복합적인 풍미를 갖게 된다.


하지만 이 땅이 품은 진실의 맛을 아는 이는 하늘의 이상을 쫓던 돈키호테가 아니었다. 그의 곁에서 묵묵히 당나귀를 몰던 시종, 산초 판자(Sancho Panza)야말로 라 만차 와인을 온몸으로 이해한 감정가였다. 돈키호테가 책에서 배운 기사도를 공허하게 읊조릴 때, 산초는 허리춤에 찬 가죽 부대 속 와인을 들이켜며 현실의 고단함을 달랬다. 그에게 와인은 뜬구름 잡는 명예가 아닌, 발바닥의 굳은살을 위로하는 구체적이고 실재하는 즐거움이었다. 그의 와인 사랑은 단순한 기호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핏줄을 타고 흐르는 본능적인 지혜에 가까웠다.


“내 아버지 쪽 친척 중 두 명은 한때 뛰어난 와인 감별사로 불렸습니다. 한 번은 어떤 와인 통의 품질을 감정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이 와인은 오래된 좋은 빈티지로 여겨졌습니다. 첫 번째 감별사는 혀끝으로 맛을 보더니 와인에서 쇠 맛이 난다고 했고, 두 번째 감별사는 코로 냄새를 맡고 가죽 맛이 난다고 선언했습니다. 와인 주인은 자신의 와인이 완전히 깨끗하며 쇠나 가죽 맛은 전혀 나지 않는다며 항의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와인통을 비우자, 바닥에서 가죽끈에 매달린 쇠 열쇠가 발견되었습니다.”


이처럼 혀끝으로 진실을 읽어내는 산초의 자부심은 라 만차의 대표 품종 아이렌(Airen)과 맞닿아 있다. 아이렌은 척박한 땅과 극심한 기후를 묵묵히 견뎌내며 라 만차 포도밭의 대부분을 차지해 온 이름 없는 민초와 같은 품종이다. 화려한 향기를 뽐내기보다 땅의 정직함을 단순하고 명료하게 드러내는 것. 이 부분이 바로 아이렌의 미덕이자 산초의 지혜와 통하는 지점이다.


[제공: 선인터내셔널]


1972년 설립된 보데가스 델 사즈(Bodegas del Saz)는 이 정직한 아이렌의 매력을 가장 잘 표현하는 와이너리 중 하나다. 이 가족 경영 와이너리는 라 만차의 밝은 석회암 토양 위에서 대를 이어 포도를 재배하며, 땅의 목소리를 와인에 그대로 담아내는 것을 목표로 삼아왔다. '에이저 벤투스 아이렌(Ager Ventus Airen)'은 100% 아이렌 품종으로 만들어졌으며, 잔에 따르면 꾸밈없는 옅은 노란빛 또는 볏짚색을 띠며, 깨끗하고 밝은 느낌을 준다. 코를 가까이하면 풍부한 꽃향기와 신선한 과일 향이 먼저 피어오르고, 시간이 지나며 은은한 견과류와 꿀의 뉘앙스가 뒤를 잇는다. 입안에서는 무엇보다 상쾌하고 깨끗한 맛이 돋보이며, 기분 좋은 과일 향과 함께 깔끔한 여운으로 마무리된다.


[제공: 비노스와인]


산초의 여정에 아이렌만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고된 길 위에는 언제나 잠시 쉬어갈 여관이 있었고, 그곳의 주인은 분명 유쾌한 와인 한 잔을 건넸을 터. '엘 까스티야 비우라 샤도네이(El Castilla Viura Chardonnay)'는 그 여관 주인의 미소를 닮은 와인이다. 라 만차의 토착 품종 비우라가 주는 신선한 골격에 국제 품종 샤도네이의 부드러운 과실미가 더해져,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편안한 맛을 선사한다. 핵과류의 향긋함과 균형 잡힌 산미는 산초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현실의 고단함을 잊고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게 했을, 소박한 위안 그 자체다.


이 두 와인이 보여주는 소박하고 정직한 세계, 이것이야말로 돈키호테의 거창한 서사 이면에 흐르던 라 만차의 진짜 목소리였다. 하지만 산초가 발 딛고 선 이 정직한 세계는 돈키호테의 거대한 망상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찢겨 나간다. 한 여관에서 벌어진 사건은 돈키호테의 광기가 빚어낸 가장 유명한 참사일 것이다.


깊은 잠에 빠진 돈키호테는 꿈 속에서 거인과 조우한다. 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칼을 뽑아 들고, 방 안에 놓여 있던 거대한 와인 가죽 부대들을 상상 속 거인으로 착각하며 맹렬하게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의 칼날이 부대를 찢을 때마다 방 안은 온통 붉은 액체로 흥건해진다. 돈키호테는 자신이 흘린 거인의 피를 보며 승리에 도취해 포효하지만, 그가 쏟아버린 것은 상상의 피가 아닌 라 만차 대지의 심장이었다.


[제공: 동원와인플러스]


그의 칼끝에서 허망하게 쏟아져 내린 라 만차의 붉은 피는 분명 '보데가스 볼베르, 뀌베(Bodegas Volver, Cuvée)'와 같은 와인이었을 것이다. 보데가스 볼베르, 그 이름은 '돌아가다'라는 뜻을 품고 있다. 양조가 라파엘 카니자레스(Rafael Canizares)는 잊혀가던 스페인 토착 품종과 수십 년 된 고목에 깃든 진정한 가치로 돌아가기 위해 와이너리를 설립했다. 돈키호테가 낡은 책 속에서 허황된 이상을 찾아 헤맸다면, 그는 늙은 포도나무의 뒤틀린 가지와 땅속 깊이 뻗은 뿌리에서 라 만차의 진정한 영혼을 발견한 것이다. 60년 이상 수령의 템프라니요 고목에서 수확한 포도로만 만들어지는 '뀌베'에는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깊숙이 뿌리내린 포도나무의 정수가 오롯이 담겨 있다. 14개월간 프랑스산 오크통에서 숙성된 이 와인은 잘 익은 검은 자두와 블랙베리의 농밀한 과실미에 감초와 다크 초콜릿 향이 녹아들어 강렬하면서도 복합적인 풍미를 자랑한다. 입안을 꽉 채우는 묵직한 구조감과 벨벳처럼 부드러운 타닌은 라 만차의 태양과 흙을 그대로 품고 있다.


망상에 도취한 기사는 그렇게 제 발밑에 흐르는 가장 위대한 현실을 베어버린다. 하지만 그의 이상이 실현되었다면, 어떤 모습일까.


놀랍게도 오늘날 라 만차에는 그 '성공한 돈키호테'의 이야기가 존재한다. 라 만차의 광활함을 벗어나 톨레도 산맥(Montes de Toledo)의 고지대에 자리 잡은 '바예 가르시아(Valle García)'는 평범한 땅에서 최고의 와인을 만들겠다는 한 사람의 위대한 꿈에서 시작되었다. 설립자 알폰소 코르티나(Alfonso Cortina)는 슬레이트와 점토질 토양, 서늘한 미기후가 만들어내는 이 땅의 독특한 잠재력을 발견했고, 모두가 불가능이라 말했던 '라 만차의 그랑 크뤼'를 현실로 만들었다. 그 결과 스페인 와인 법규의 정점인 '비노 데 파고(Vino de Pago)' 등급을 획득하며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했다. 이는 자신만의 왕국을 세웠던 돈키호테의 선언이 현실에서 이뤄진 것과 같다.


[제공: 롯데칠성음료]


이들의 대표작 '히페리아(Hipperia)'는 돈키호테가 꿈꿨던 모든 가치가 블렌딩된 결정체와도 같다. 카베르네 소비뇽, 카베르네 프랑, 메를로, 쁘띠 베르도가 어우러진 이 와인은 잔에 따르는 순간부터 짙은 루비색 너머로 복합적인 세계를 드러낸다. 블랙커런트와 블랙체리의 아로마가 풍성하게 피어오르는 첫인상을 지나, 유칼립투스 같은 서늘한 발사믹 노트와 감초, 정향의 스파이시 노트가 복잡한 층위를 완성한다. 오랜 오크 숙성에서 비롯된 삼나무와 다크 초콜릿 향은 이 와인이 품은 거대한 서사를 암시한다. 입안에서는 힘차면서도 우아한 타닌과 생생한 산미가 완벽한 균형을 이루며 긴 여운을 남긴다.


세상의 모든 잘못을 바로잡고, 악을 응징하며, 정의를 세우려 했던 돈키호테의 이상은 더할 나위 없이 고결했다. 다만 그는, 그 무엇도 이룰 수 없는 사람이었을 뿐이다. 무엇보다 돈키호테, 아니 케사다, 혹은 케하나라고 불리던 이 사내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망상이 현실이 아님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들판에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그를 괴롭혔다. 자신이 기사 서임을 받은 적이 없었음을 기억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집으로 돌아가 하인과 조카딸을 돌보는 길을 택하지 않고, 기사 행색을 계속하며 처음 만나는 기사에게 정식으로 기사 임명을 받으면 되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400년 전 기사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의 심장을 서늘하게 찌른다. 우리 시대의 돈키호테들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자신의 신념에 어긋나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할 때면, 애써 눈을 감고 목소리를 높여 자신의 성채를 방어한다. 망상임을 알면서도, 그 망상에 기대는 것이 현실을 직시하는 고통보다 쉽기 때문이다.


결국 모두가 마음속에 각자의 풍차와 거인을 품고 살아간다. 내가 휘두르는 칼에 피를 토해내는 것은 악한 거인인가, 아니면 적포도주가 담긴 부대인가. 혹시, 나 역시 또 다른 로시난테 위에 올라타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피에라브라스의 향유'가 아닌 현실을 일깨워줄 와인을 한 모금 들이키며, 아이렌과 비우라를 거쳐 올드바인 템프라니요, 더 나아가 비노 데 파고까지 정직하게 이어가야 한다. 돈키호테와 그의 싸움 속에서 택해야 할 길은, 와인 잔 속에서 빛나는 현실을 직시하는 용기다.

프로필이미지김태형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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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25.09.09 15:21수정 2026.03.20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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