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책갈피 속 와인 아로마] '모스크바의 신사'와 샤토네프 뒤 파프


미국의 현대문학 작가 에이모 토울스(Amor Towles)의 <모스크바의 신사(A Gentleman in Moscow)>(2016)는 상실을 통한 재발견의 이야기다. 소설이 시작되는 배경은 1922년 러시아 혁명 직후다. 주인공인 귀족 출신 알렉산더 로스토프 백작은 메트로폴 호텔에 가택 연금돼 30년간 갇혀 지낸다. 혁명 정부는 계급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그의 저택과 재산, 심지어 호텔 와인 저장고의 라벨까지 검열한다. 그러나 백작은 매일의 식탁, 책 읽기, 타인과의 대화라는 일상의 의례를 통해 품위를 재구성한다. 소설의 메시지는 단순하지만 강렬하다. 외적 권위가 사라져도 본질은 남는다. 이 소설이 와인과 만나는 순간, 감각은 철학이 된다.


혁명 정부는 라벨에서 생산자, 빈티지, 산지 같은 정체성을 지우고 와인을 오로지 레드와 화이트로 환원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메트로폴 호텔의 지하실은 칠흑 같은 어둠으로 덮여 있었지만 병들은 서로 다른 시간을 품고 있었다. 백작은 와인 병의 굴곡을 더듬는다. 교차된 열쇠의 요철이 엄지에 닿는 순간, 손끝에서부터 전해지는 것이 있다. 획일화의 폭력 앞에서, 촉각으로 남은 본질.


샤토네프 뒤 파프(Châteauneuf-du-Pape)는 이 소설에서 알렉산드르 로스토프 백작의 세련된 미식 감각과 와인에 대한 안목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등장한다. '교황의 새 성'이라는 뜻인 샤토네프 뒤 파프의 이름은 아비뇽 교황청이 여름을 길들이던 권력의 계절학에서 비롯된다. 교황청은 남부 론의 고원과 언덕에 포도원을 조성하고, 규율과 후원을 겹겹이 쌓아 와인을 빚었다. 그 기억은 훗날 와인 병 어깨에 양각으로 새겨진 삼중관(triple crown)과 교차된 열쇠 형상의 문장이 되어 전해진다. 결국 이 이름은 지명 표기를 넘어, 신앙과 통치, 농업기술이 교차한 하나의 문화를 뜻한다. 한 병이 식탁 위에 오르는 순간 와인이 품은 시간은 맛과 향으로 번역된다.



해발 120m 구릉에 자리한 테루아는 태양과 바람, 자갈과 모래가 주고받는 섬세한 조화로 드러난다. 샤토네프 뒤 파프를 대표하는 토양은 굵고 둥근 자갈, 갈레 룰레(galets roulés)다. 달이 뜨고, 온종일 달궈진 자갈들이 태양의 열기를 내뿜으면, 그르나슈의 과실은 반짝임을 얻고 향기의 그림자는 더욱 짙어진다. 북서에서 밀려드는 차갑고 메마른 미스트랄 바람은 포도밭을 말리고 씻어내며 병해를 쓸어낸다. 건조와 정화의 리듬은 밀도를 남기고, 껍질의 직물을 세밀하게 조인다. 동일한 언덕 위에서도, 사프르(Safres)라 불리는 사질토가 깔린 포도밭에서는 명료한 아로마와 실키한 타닌을, 점토질과 석회가 두드러지는 곳에서는 단단한 바디감을 전한다. 이처럼 샤토네프 뒤 파프라는 하나의 이름 아래, 여러 목소리가 모여 하모니를 이룬다.


라벨은 이름을 부여한다. 그러나 존재는 명명 이전부터 그곳에 있었다. 독일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는 서양 철학이 존재(Sein) 그 자체를 묻지 않고, 개별적으로 명명 가능한 것들, 즉 존재자(Seiendes)만 다뤄왔다고 비판했다. 라벨에 적힌 생산자, 빈티지, 산지는 존재자다. 그러나 병의 요철에 담긴 역사, 자갈의 축열, 바람의 건조, 이것이 '어떻게 거기 있는가'를 묻는 것, 그것이 바로 존재에 대한 물음이다. 그리고 이 질문을 하는 자가 곧 현존재(Dasein)다. 메트로폴 호텔의 밤, 백작은 라벨을 읽는 것이 아니라, 병을 더듬으며 존재에 대한 물음을 실천했다. 혁명 권력은 라벨을 뜯어 존재자를 지웠지만, 현존재인 백작은 촉각으로 존재를 다시 열었다. 표면이 지운 것을 구조가 끝내 기억한다. 이것이 존재론의 첫 명제다.



자비에 비뇽, 달링 뀌베 아노님 샤토네프 뒤 파프(Xavier Vignon, Daring Cuvee Anonyme Chateauneuf-du-Pape)는 '이름' 대신 '본질'로 말하도록 설계된 와인이다. '익명의 뀌베'라는 이름은 품종, 비율, 포도밭 등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익명적 블렌드'를 추구하는 와이너리 철학을 반영한다. 애초에 여러 품종을 함께 재배하는 다품종 포도밭에서 수확한 포도를 사용하기 때문에, 각 품종의 비율을 명확히 밝히기 어렵다. 노즈에서는 검은 체리와 자두가 풍성하게 열리고, 이어 타임과 로즈메리의 아로마틱 노트, 후추향이 미세하게 번진다. 한 모금 머금는 순간, 신선한 산도가 입안에서 빠르게 확산하고, 섬세한 타닌이 균일하게 남아 고운 질감을 전한다. 목넘김 후에는 감초와 가죽의 잔향이 길게 이어진다. 이러한 감각은 제작의 문법을 통해 발현된다. 외부 공기와 완전히 차단된 100% 습도·무산소 상태에서 숙성하는 비나리움(Vinarium) 공법은 과실의 표현력을 산화 없이 보전하여, 익명 속에서도 개별성이 흐려지지 않게 한다. 이 와인은 '무엇으로 만들었는가'를 소란스럽게 말하지 않는다. 오직 '어떻게 남는가'를 보여 준다. 아로마의 볼륨, 산도의 축, 타닌의 결, 그리고 여운의 길이. 라벨이 사라져도, 문장은 남는다.



도멘 드 라 그라베레트 샤토네프 뒤 파프 수흑스(Domaine de la Graveirette, Chateauneuf-du-Pape Source)는 스테인리스 혹은 시멘트 탱크 숙성만으로 테루아의 원음을 전면에 내세운다. 부르고뉴에서 익힌 양조의 미학을 도입한 줄리앙 마스는 과장을 낮추고 순도를 높이는 쪽을 선택했으며, 계속해서 포도밭 본래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자세를 유지한다. 혁명 정부는 백작에게서 거처뿐 아니라 재산과 지위까지 모두 빼앗았다. 그에게 남은 것은 메트로폴 호텔의 작은 다락방 하나와 하루를 가늠하는 의례뿐이었다. 그러나 백작은 과거의 권위에 기대지 않았다. 덜어낸 뒤 남은 본질이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이다. 이 와인은 바로 그 정신을 닮았다. 붉은 체리의 선명한 과실 위로 스파이스가 얹히고, 시간이 지날수록 밝고 우아한 캐릭터가 또렷해진다. 무거운 외피를 걷어내자 중심이 드러나는 모습이다. 전통적인 샤토네프 뒤 파프보다 가볍고 세련되며, 높은 산도와 균형감이 돋보인다. 백작의 품위가 작은 일상의 반복에서 쌓였듯, 이 와인의 골격도 테루아가 갖춘 면모로부터 나온다.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심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메트로폴의 밤, 백작은 혼자가 아니었다. 호텔의 주방장 에밀은 일상의 식탁으로 품위를 지켜냈고, 안드레이는 백작의 지위 회복을 위해 몸을 던졌으며, 고아 소녀 소피아는 백작에게 보호할 누군가를 안겨주어 삶의 목적을 다시 열었다. 하이데거가 말했듯 현존재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실현된다. 백작의 존재는 귀족이나 백작이라는 호칭이 아니라, 에밀과 함께 나누는 식탁 위 침묵, 안드레이를 격려하는 한 마디, 소피아의 손을 잡는 그 순간에 비로소 온전해진다. 연대란 동정이 아니라 서로를 비켜서는 예의였다. 옴니아(Omnia)는 라틴어로 '모든 것'을 뜻하지만, 사실은 '함께'를 의미한다. 로템 뮈니에 사우마 옴니아(Rotem & Mounir Saouma Omnia)는 여러 포도밭과 품종을 겹쳐 한 잔의 선율을 만드는데, 그 비결은 각 요소가 자신의 자리를 지키면서 다른 것의 빈틈을 차분히 메운다는 것이다. 잔에 오르는 순간, 붉은 과실의 아로마가 또렷하게 들어서지만 결코 전면을 차지하지 않는다. 꽃향기는 두께를 더하되 앞서지 않고, 타닌은 실키하게 물러서며 입안 가득 고운 질감을 남긴다. 모두가 각자의 높이에서 정확한 음정을 유지하되, 다른 음성을 가리지 않는다. 연대는 약함을 감추는 것이 아닌 서로의 강함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현존재는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오직 '함께'의 구조 속에서만 완성된다.



오지에 끌로 드 로라뚜아르 샤토네프 뒤 파프 블랑(Ogier Clos de l'Oratoire Châteauneuf-du-Pape Blanc)은 “붉은 저항에서 벗어나, 백색의 명료함으로 긴 여정을 정리한다. 잔에 담긴 와인 속에서 샤토네프 뒤 파프의 백색 품종들이 겹치며 황금빛을 이룬다. 서양배와 핵과류, 그리고 꿀의 아로마에 짭조름한 미네랄의 터치가 스며들고, 입안에서는 신선한 산미가 호흡한다. 다양한 토양 위에 선 포도밭은 여전히 여러 목소리를 담고 있지만, 이제 그 목소리들은 백색 스펙트럼 위에서 하나로 정렬된다. 30년을 견딘 백작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은 화려한 저항이 아니라, 명징한 행동이었다. 메트로폴을 떠날 때 그가 남긴 것을 떠올리며 와인병을 기울이면, 삼중관과 교차된 열쇠의 요철이 또렷이 드러난다. 라벨이 사라져도 문장은 남는다. 촉각으로 증명되었던 본질은, 마지막에 명료한 색으로 다시 읽힌다.


이제 잔을 들 차례다. 코끝에서 펼쳐지는 아로마, 입안에서 헤아려지는 산도와 타닌이 말해준다. 라벨 없이도 존재하는 이 감각들이야말로, 당신이 지금 이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다. 지하실의 어둠 속에서 손끝으로 읽었던 것을 이제는 코와 혀로 읽는다. 라벨은 이미 사라졌다. 이제, 당신에게는 무엇이 남아 있는가.

프로필이미지김태형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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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25.11.11 09:00수정 2025.11.11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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