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구르메 트래블러 와인(Gourmet Traveller Wine)에서 선정한 말보로(Marlborough) 지역 최초의 '뉴질랜드 올해의 와인메이커', 2013년 IWSC '올해의 뉴질랜드 와인 생산자' 등 줄스 테일러(Jules Taylor)는 말보로 지역의 많은 와인메이커들 중 단연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 그의 와이너리 줄스 테일러 와인스(Jules Taylor Wines)의 와인 또한 말보로 지역 최고의 와인으로 평가받는다. 현대적인 말보로 와인의 선구자로 손꼽히는 '소비뇽 블랑의 여왕', 줄스 테일러를 도운스페이스에서 만났다.

[한국을 찾은 와인메이커 줄스 테일러]
줄스 테일러는 1973년 말보로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말보로 지역에 최초로 상업용 포도가 식재된 시기였다. “일차선 도로에 신호등도 없는 정말 작은 마을이었어요. 당시 말보로는 양과 소를 키우고 이런저런 과일과 채소를 재배하는 한적한 농촌이었죠.”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말보로를 떠나 크리스트처치(Christchurch)에서 동물학과 미생물학을 공부하던 중 와인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대학 시절에 와인을 꽤 좋아했어요. 포도가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음료로 바뀌는 것이 신기했죠. 그래서 더 공부하기로 했습니다.” 링컨(Lincoln) 대학교에서 양조학을 공부한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90년대 초반에도 말보로에는 제대로 된 와인 기반 시설이 없었고, 특히 여성 와인메이커는 거의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와인 생산은 스트레스가 많은 일이에요. 특히 수확 시기가 더욱 그렇죠. 매년 단 한 번의 기회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만큼 신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계속 사랑에 빠지고 있는 것이겠죠.”
말보로에서 2년간 수확을 경험한 후 그는 이탈리아로 향했다. 피에몬테에서 3년, 시칠리아에서 5년간 다양한 경험을 쌓은 후 다시 말보로로 돌아와 말보로 밸리 셀라스(Marlborough Valley Cellars), 생 클레어(Saint Clair), 킴 크로포드(Kim Crawford) 등에서 와인메이커로 활약하며 뉴질랜드 와인 산업의 일원이 됐다. 그리고 적은 양이지만 자신의 와인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2006년, 줄스와 남편 조지 엘워시(George Elworthy)는 자신들의 와인에만 전념하기로 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큰 결정이었어요. 안정적인 직장에서 떠나 모든 것을 전부 새롭게 시작해야 했고, 사람들의 신뢰를 얻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말보로 지도와 줄스 테일러가 포도를 공급받는 포도밭 위치 (출처: 줄스 테일러 와인스)]
줄스는 말보로 밸리 셀라스에서 얻은 경험이 큰 자산이 되었다고 한다. 다양한 말보로 지역 포도로 와인을 만들었고, 각 지역 포도마다 따로 양조하는 와이너리라 세부 지역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와이라우 밸리(Wairau Valley)는 와이라우강 주변으로 오랫동안 충적토가 쌓여 형성됐지만, 아와테레 밸리(Awatere Valley)는 빙하로 형성됐기 때문에 훨씬 더 깊고 복잡한 지질구조를 갖는다. 와이라우 밸리에서도 해변으로 갈수록 토양이 비옥하고 아로마가 풍성한 소비뇽 블랑이 잘 자라지만, 내륙 산맥 부근 포도밭에는 피노 누아와 샤도네이가 더 적합하다. 특히 줄스 테일러 와인의 대다수 피노 누아가 나오는 레킨(Wrekin) 포도밭은 말보로에서도 가장 높은 품질의 피노 누아가 생산되는 곳이다.
줄스와 함께 한국을 방문한 마케팅 담당 케이티 프레스콧(Katy Prescott)은 줄스 테일러가 말보로 토박이로서, 누구보다도 말보로를 잘 알고 이 지역에 뛰어난 인적 네트워크가 있는 것이 성공 비결 중 하나라고 언급했다. 말보로 지역은 포도밭의 가격이 높기 때문에 대부분의 와이너리에서는 포도 생산자들에게 포도를 공급받아 와인을 생산한다. 줄스 테일러 와인스도 직접 소유하고 있는 포도밭은 약 9헥타르 정도이며 그 외 말보로 각 지역의 포도로 와인을 생산한다. “어느 포도밭은 휴대폰 통화가 안 될 정도로 외진 곳에 있어요. 사람에게나 포도에게나 최고의 포도밭인 셈이죠.”
친환경적 농법 또한 줄스 테일러가 강조한 내용이었다. 뉴질랜드는 젊은 와인 생산국이기 때문에 품종이나 와인 양조 방법에 대해서는 자유롭지만 포도 재배와 양조 시 환경보호에 대한 규제는 상당히 까다롭다. 물의 사용량과 비료 및 화학약품의 종류 등을 세세하게 모니터링하고, 지속 가능한 농법에 대한 엄격한 규칙을 지켜야 한다. 줄스 테일러는 이 규칙을 100% 준수할 뿐 아니라,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고, 뉴질랜드에서 첫 번째로 탄소제로 병입 시설을 마련하는 등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말보로의 자연환경 보호에 앞장서고 있다. 줄스의 동식물 사랑은 대학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포도밭 주변에는 많은 토착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저는 줄스 테일러 와인스와 관계 있는 사람들 모두의 행복과 이익에도 큰 관심이 있어요. 포도 재배자들에게 우리가 원하는 기준을 정확히 지키기를 요구하지만, 그만큼 충분한 보상을 하고 있습니다. 각국의 수입사들도 이익을 얻어야 하기 때문에, 와인 출고 가격을 너무 높지 않게 유지하려고 노력합니다. 직원들도 주 4일 근무를 하고 있어요. 그들이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 또한 중요하기 때문이죠.”
줄스와 가장 먼저 테이스팅한 와인은 더 베터 하프 말보로 소비뇽 블랑(The Better Half Marlborough Sauvignon Blanc) 2025였다. 줄스의 남편 조지 엘워시 또한 와인메이커지만 가족 와이너리 설립 후 와인양조를 제외한 모든 일, 즉 와이너리 운영과 재정 관리 업무를 포함한 온갖 일을 도맡아왔다. 와이너리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선 후 그는 다시 자신의 와인을 만들고 싶어 했고,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미 너무 유명해진 아내에 대한 사랑을 담아 '더 나은 반쪽(The Better Half)'으로 이름을 정했다. 자신이 선택한 포도밭과 양조기법으로 만든 와인으로, 이 와인은 줄스의 와인보다는 산도가 약간 낮은 대신 당도가 있어 마시기 쉽다. 와인 초보자에게 쉽게 어필할 수 있는 사랑스러운 말보로 소비뇽 블랑이다. 모과와 서양배, 하얀 꽃 향에 은은하게 구아바 향도 느껴진다. 말보로 특유의 은은한 허브 향과 함께 상쾌한 맛이 일품이다. 조지 역시 훌륭한 와인메이커임이 틀림없다.

[줄스의 남편이자 와인메이커 조지 웰워시 (출처: 줄스 테일러 와인스)]
다음으로 줄스 테일러의 와인 3종을 시음했다. 대표 와인인 줄스 테일러 말보로 소비뇽 블랑(Jules Taylor Marlborough Sauvignon Blanc) 2024는 첫 와인보다 더욱 숙성된 느낌과 함께 보다 풍성한 향과 레이어를 보여준다. 지난 30년간 말보로 소비뇽 블랑은 풀향과 구즈베리향이 진한 스타일이 대세였지만, 줄스로 대표되는 모던 말보로 소비뇽 블랑은 보다 열대과일향이 강조되면서 복합미가 풍부한 스타일이다. 예전보다 산도와 녹색 뉘앙스를 줄이면서 복합적인 풍미를 담아내고 숙성에 의한 변화 또한 더욱 다양하게 만들어낸다. 포도밭도 일반적인 말보로 와이너리가 이용하는 와이라우 밸리 중간의 넓은 포도밭이 아닌 산맥과 더 가까운 포도밭을 선택한다.
줄스는 포도 수확시기를 자신의 테이스팅으로 결정한다. 수확시기가 다가오면 매일 포도밭에서 포도를 맛보며 구획마다 다르게 수확시기를 정한다. 소비뇽 블랑은 다른 품종과 달리 기계 수확을 해야 껍질에서 아로마가 더욱 풍부하게 추출된다고 한다. 9-10도 낮은 온도에서 3주 이상 발효를 진행한 후, 모든 세부지역 와인을 테이스팅하고 블렌딩해 최종 와인의 맛을 결정한다. 현대적인 말보로 와인을 느끼기 위해서는 꼭 한번 경험해 봐야 하는 와인이다.

[줄스 테일러 와인 4종. 소비뇽 블랑 두 종은 나라셀라를 통해 국내에 수입 중이며, 샤도네이와 피노누아는 현재 수입을 검토 중이다]
초창기 말보로에서는 스파클링 와인을 만들기 위해 샤도네이와 피노 누아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이때 가져온 품종은 사실 일반 와인을 만들기에는 적합하지 않았지만 1990년대 말 다양한 클론이 뉴질랜드에 들어오면서 큰 변화가 생겼다. 말보로에 적합한 클론을 사용하면 무척 뛰어난 샤도네이와 피노 누아 와인을 생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줄스 테일러 말보로 샤도네이(Jules Taylor Marlborough Chardonnay) 2024는 3종의 샤도네이 클론을 사용하며 30-35% 정도 손 수확을 한다. 오크 배럴과 탱크에서 발효하고 야생효모도 특정 비율 이상 사용하는 등 복합미를 위해 다양한 양조방식을 적용한다. 말보로 샤도네이의 미네랄리티와 미묘한 시트러스향, 야생효모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뉘앙스를 강조하기 위해 새 오크는 약간만 사용한다. 농축된 과실향과 맛이 가득하며 100% 젖산전환을 진행해 부드러운 뉘앙스가 입안을 감싸는 둥근 와인이다. 잘 익은 사과 및 핵과류에 고소하게 구운 견과류, 은은한 바닐라 향이 흐르며 시간이 지나면 고소한 누룽지 향도 느껴진다. 신세계와 구세계의 샤도네이 스타일이 절묘하게 섞여 있는 매력적인 와인이다.
마지막으로 줄스 테일러 말보로 피노 누아(Jules Taylor Marlborough Pinot Noir) 2023을 테이스팅했다. 피노 누아는 전체 생산량의 7% 정도이지만, 가장 시간과 노력이 많이 필요한 포도 품종이다. 매년 자연이 선사하는 바가 너무 다르기 때문에, 그에 따라 다른 와인이 나오고 와인 양조도 달라진다. 하지만 항상 손으로 수확하고 4-10일 동안 저온침용, 100% 야생효모를 사용하는 것은 동일하다. 야생효모를 이용한 발효에는 항상 위험이 따르지만 피노 누아 양조에서는 야생효모 발효를 실패한 적이 없다고 한다. 피노 누아에 기대하는 붉은 과실향이 가득하며, 테루아에서 나오는 은은한 흙, 가죽 향 덕분에 상당히 복합적인 향을 보여준다. 시나몬 같은 향신료 느낌과 장미 드라이플라워, 다크초콜릿 같은 어두운 향도 찾을 수 있다. 맛에서 느껴지는 깊이와 균형감 또한 훌륭하다. 뉴질랜드 말보로는 소비뇽 블랑만의 땅이 아니라, 피노 누아에게도 분명 기회와 영광의 땅이 될 수 있다고 느껴진다. 겸손하지만 걸출한 와인메이커 줄스 테일러는 그 영광의 시간을 만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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