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시칠리아를 기반으로 한 두 와이너리, 쿠수마노(Cusumano)와 알타 모라(Alta Mora)를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 마련됐다. '쿠수마노 & 알타 모라 와인과 함께하는 육인영 소믈리에의 와인 토크 세미나'라는 타이틀로 열린 이번 행사에서는 시칠리아(Sicily)와 에트나(Etna) 와인을 비교 시음하며 각 지역의 개성과 스타일을 살펴볼 수 있었다. 특히 이탈리아에서 활동 중인 육인영 소믈리에가 진행을 맡아, 생생한 현지 경험을 바탕으로 시칠리아 와인의 매력을 보다 깊이 있게 풀어냈다.

[육인영 소믈리에, 사진: 정선경]
새롭게 조명되는 시칠리아 와인
시칠리아는 지중해 최대의 섬으로, 이탈리아 남부에 위치한다. 고대 그리스 문명부터 로마, 비잔틴, 아랍, 노르만 왕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명이 겹겹이 쌓이며 독특한 문화적 지층을 형성해 왔고,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오늘날 시칠리아의 음식과 와인 문화 전반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자연환경 측면에서 시칠리아는 흔히 고온 건조한 기후로 인식되지만, 실제로는 해안과 산악지대가 공존하며 고도 차이에 따른 기후 편차가 매우 큰 지역이다. 특히 북동부에 위치한 에트나 화산 지대는 화산토 기반의 토양, 높은 고도, 그리고 큰 일교차라는 조건이 결합돼 전통적인 남부 이탈리아 와인과는 다른 구조감과 산미를 만들어낸다. 육인영 소믈리에는 화산토의 특징을 단순히 '미네랄리티'로 일반화하기보다는, 배수력과 토양 구성의 다양성이 와인의 질감과 긴장감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라고 설명했다.
시칠리아는 이탈리아 내에서도 포도 재배 면적이 가장 넓은 지역 중 하나로, 다양한 토착 품종이 폭넓게 유지되고 있다. 최근에는 화이트 품종인 인솔리아(Insolia)와 그릴로(Grillo)를 중심으로, 과도한 추출이나 양조적 개입을 지양하고 고도와 일교차라는 자연 조건을 활용해 균형감 있는 화이트 와인을 추구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는 시칠리아 화이트 와인이 단순히 가볍고 접근하기 쉬운 스타일을 넘어, 음식과의 조화를 염두에 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인솔리아는 고대부터 시칠리아에서 재배돼 온 토착 품종으로, 마르살라(Marsala) 생산에도 사용돼 왔으며 토스카나에서는 안소니카(Ansonica)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강한 개성을 지닌 아로마틱 품종은 아니지만, 시트러스 계열의 과일과 노란 과실의 뉘앙스, 절제된 산미가 특징이다. 그릴로는 비교적 완숙도가 높은 품종으로, 충분한 바디감과 안정적인 구조를 형성한다.

[쿠수마노와 알타 모라 와인들, 사진: 정선경]
쿠수마노 vs 알타 모라
이날 세미나는 쿠수마노 5종, 알타 모라 2종, 총 7종의 와인을 테이스팅하며 시칠리아 전반과 에트나 화산 지역의 테루아를 단계적으로 살펴보는 구성으로 진행됐다. 쿠수마노와 알타 모라 두 브랜드 모두 쿠수마노 패밀리가 소유하고 있으나, 생산 지역과 와인 스타일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쿠수마노는 2001년 형제인 알베르토와 디에고 쿠수마노에 의해 설립된 시칠리아 와이너리다. 비교적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시칠리아 와인의 현대적 이미지를 구축한 생산자로 평가받고 있다. 창립 초기부터 대량 생산보다는 자체 포도원 기반의 품질 중심 생산을 지향해 왔으며, 현재도 100% 자가 포도원에서 수확한 포도만 사용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와이너리는 시칠리아 전역에 걸쳐 포도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특히 해발 700m 전후의 산악지대 포도밭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육인영 소믈리에는 시칠리아 현지 방문 경험을 바탕으로 “쿠수마노의 주요 포도원은 대부분 산악지대에 위치하며, 이는 특히 화이트 와인에서 신선함과 구조감을 동시에 구현하는 데 중요한 요소”라고 설명했다.
쿠수마노는 재생에너지 활용, 살충제 사용 최소화, 포도원 내 생물다양성 유지 등 친환경 농법을 실천하고 있다. 와이너리 역시 주변의 흐르는 물을 활용해 지하 셀러의 온도를 낮추는 구조로 설계됐다. 이러한 접근은 단순한 마케팅 요소를 넘어, 시칠리아라는 지역 환경 속에서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품질을 유지하기 위한 기반으로 작용하고 있다.
쿠수마노는 인솔리아와 그릴로 같은 토착 화이트 품종부터 레드 와인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포트폴리오를 갖추고 있다. 합리적인 가격대에서 일관된 품질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레스토랑을 중심으로 한 온트레이드 시장에서 활용도가 높은 생산자로 자리 잡았다. 동시에 시칠리아 프리미엄 와인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혁신적인 와이너리로도 평가받고 있다.
알타 모라는 쿠수마노 패밀리가 에트나 화산 지역의 잠재력에 주목하며 설립한 와이너리로, 시칠리아 내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테루아를 기반으로 한다. '알타 모라(Alta Mora)'라는 이름은 에트나 산의 높은 고도와 어두운 화산토를 의미하는 표현으로, 흔히 'High, Black'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에트나 북사면의 고도 높은 지역을 중심으로 포도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약 600~1,000m 고도에 걸쳐 분포한 포도밭은 활화산 에트나의 화산재와 용암이 풍화된 토양, 높은 고도, 그리고 큰 일교차라는 복합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미세기후와 화산성 토양 덕분에 알타 모라의 와인은 우아한 구조감과 선명한 미네랄리티, 균형 잡힌 스타일을 보여준다. 또한 이 지역은 개발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은 자연환경이 유지되고 있어, 살충제나 제초제 없이도 포도 재배가 가능하다.
에트나 지역은 오랜 시간에 걸쳐 용암과 화산재로 덮이는 과정을 반복해 왔으며, 이로 인해 고도와 방향에 따라 토양의 성격이 미세하게 달라졌다. 이러한 차이는 같은 포도 품종이라도 전혀 다른 향과 구조를 지닌 와인을 만들어내는 요인이 된다. 에트나에서는 이처럼 뚜렷한 개성과 품질을 보여주는 미세 지형 단위를 '콘트라다(Contrada)'라 부르며, 이는 부르고뉴의 크뤼(Cru)와 유사한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육인영 소믈리에는 이에 대해 “독일 리슬링의 단일 포도밭 개념과도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에트나에는 총 142개의 콘트라다가 존재하며, 알타 모라는 이 가운데 5개의 콘트라다에 포도밭을 보유하고 있다. 알타 모라는 콘트라다 간의 차이를 브랜드 정체성의 핵심으로 삼아, 에트나 DOC 로쏘와 비앙코 외에도 각 콘트라다의 개성을 강조한 싱글 콘트라다 와인을 선보이고 있다. 현재 국내에는 이들 콘트라다 중 페우도 디 메초(Feudo di Mezzo)를 만날 수 있으며, 에트나 화산 지역 특유의 구조감과 미네랄 중심의 스타일을 비교적 명확하게 보여주는 레인지로 평가받는다.
알타 모라는 에트나를 대표하는 레드 품종 네렐로 마스칼레제(Nerello Mascalese)를 주력으로 사용하며, 화이트 와인에는 카리칸테(Carricante)를 중심으로 한다. 알타 모라의 와인은 음식과의 조화를 염두에 둔 스타일로, 생기 있는 과일 풍미와 경쾌한 바디감이 특징이다. 모든 와인은 100% 자가 포도밭에서 손으로 수확한 포도만을 사용해 양조하며, 과도한 개입보다는 포도밭별 개성을 온전히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탈리아 현지에서 활동 중인 육인영 소믈리에
이번 세미나를 진행한 육인영 소믈리에는 현재 이탈리아 모데나(Modena)에 위치한 프란체스케타58(Franceschetta58)에서 근무하고 있다. 이곳은 세계적인 셰프 마시모 보투라(Massimo Bottura)가 이끄는 레스토랑 그룹의 캐주얼 다이닝 콘셉트로, 지역 식재료와 전통적인 이탈리아 요리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풀어내는 공간이다.
육인영 소믈리에는 한국에서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중심으로 커리어를 쌓은 뒤 모데나로 건너가, 현지 레스토랑에서 와인 서비스와 와인 리스트 운영을 경험 중이다. 이탈리아 와인을 현장에서 직접 접하며, 지역 생산 와인과 레스토랑에서의 실제 활용을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왼쪽부터) 쿠수마노 인졸리아, 샤마리스 그릴로, 잘레 샤르도네, 사가나, 사진: 정선경]
쿠수마노 인졸리아 Cusumano Insolia 2023
인졸리아 100%로 생산했다. 옅은 레몬 컬러를 띠며 레몬 제스트, 노란 사과, 은은한 열대 과일 뉘앙스가 정돈된 형태로 나타난다. 산미는 날카롭지 않고 부드럽게 이어지며, 입안에서 균형 중심의 구조를 형성한다. 미네랄감이 깔끔하게 유지되며, 피니시에서는 시트러스 껍질 안쪽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쌉쌀함이 남는다. 합리적인 가격대에서 안정적인 완성도를 갖춘 데일리 화이트 스타일로, 레스토랑 하우스 와인으로 활용하기에 적합하다.
쿠수마노 샤마리스 그릴로 Cusumano Shamaris Grillo 2024
그릴로 100%로 양조한 화이트 와인으로, 밝은 레몬빛과 볏짚을 연상시키는 컬러를 띤다. 흰 꽃과 레몬, 잘 익은 배를 비롯한 노란 과실의 향이 비교적 또렷하게 드러난다. 산도는 지나치게 높지 않으면서도 전체 구조를 지탱할 만큼 충분하며, 입안에서는 가벼운 짭짤함과 함께 미네랄 터치가 느껴진다. 바디는 미디엄 수준으로, 과실의 볼륨과 산도의 균형이 안정적이다. 파스타 등 탄수화물 중심의 요리와 매칭하기 좋은 실용적인 화이트 와인으로, 가격 대비 품질 경쟁력이 높다.
쿠수마노 잘레 샤르도네 Cusumano Jalé Chardonnay 2023
시칠리아 해발 약 700m 산악지대에서 재배한 고품질 샤르도네 100%로 양조했다. 옅은 골드 컬러를 띠며, 바닐라와 잘 익은 사과, 배, 노란 과실 계열의 향이 오크 숙성에서 기인한 캐릭터와 함께 나타난다. 오크의 존재감은 분명하지만 과도하지 않아, 과실 중심의 구조를 해치지 않는다. 산미는 부드럽고 텍스처는 비교적 매끄럽다. 높은 고도에서 비롯된 신선함이 바탕을 이루며, 샤르도네에 익숙하지 않은 소비자도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는 스타일이다.
쿠수마노 사가나 Cusumano Sagana 2019
네로 다볼라 100%로 만든 짙은 루비 컬러의 레드 와인이다. 블랙체리, 자두, 검은 베리류 과실 향이 중심을 이루며, 스파이스와 약간의 허브 뉘앙스가 뒤따른다. 구조감이 분명하고 집중도가 높으며, 타닌은 잘 다듬어져 있다. 산도와 알코올의 균형을 이루며 장기 숙성을 염두에 둔 스타일임이 드러난다. 단순한 과실 중심 레드가 아닌 구조와 깊이를 중시한, 쿠수마노의 레인지 중에서도 프리미엄 라인에 해당한다.
쿠수마노 모스카토 델로 주코 Cusumano Moscato dello Zucco 2014
모스카토 품종으로 양조한 디저트 와인이다. 밝은 골드 컬러를 띠며, 오렌지 블로섬과 잘 익은 복숭아, 살구, 꿀의 아로마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당도는 분명하지만 무겁지 않고, 이를 지탱하는 산도가 더해져 끈적임 없는 인상을 준다. 질감은 부드럽고 피니시는 비교적 길게 이어진다. 디저트 와인임에도 과도한 단맛에 치우치지 않아 음식과의 페어링 활용도가 높으며, 실제로 레스토랑 디저트 페어링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알타 모라 에트나 비앙코와 에트나 로쏘, 사진: 정선경]
알타 모라 에트나 비앙코 Alta Mora Etna Bianco DOC 2021
카리칸테 100%로 양조한 화이트 와인이다. 연한 레몬 컬러를 띠며, 레몬과 라임, 풋사과, 젖은 돌을 연상시키는 미네랄 아로마가 중심을 이룬다. 산도는 뚜렷하고 직선적이며, 바디는 가볍지만 적절한 밀도가 느껴진다. 피니시에서는 은은한 짭짤함과 함께 미네랄 여운이 길게 이어진다. 시칠리아 화이트 와인 가운데서도 구조와 산미를 중시한 스타일로, 에트나 화산 지역의 개성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알타 모라 에트나 로쏘 Alta Mora Etna Rosso DOC 2020
네렐로 마스칼레제 100%로 양조한 레드 와인이다. 투명한 루비 컬러를 띠며, 붉은 체리와 크랜베리, 말린 허브, 화산재를 연상시키는 미묘한 스모키 뉘앙스가 복합적으로 펼쳐진다. 산도는 높고 탄탄하며, 타닌은 미세하지만 단단하다. 과실보다 구조가 전면에 드러나는 스타일로, 알코올의 과도한 존재감 없이 긴장감 있는 인상이 유지된다. 에트나 로쏘 특유의 직선적이고 미네랄 중심적인 성격을 비교적 명확하게 보여주는 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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