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흐름 속에서 트렌디한 스타일로 새로운 얼굴을 보여주는 와인들이 늘어나지만, 정통성을 지키며 이름에 걸맞은 품질로 꾸준한 사랑을 받는 브랜드들도 있다. 피터 르만(Peter Lehmann)은 호주 와인, 특히 바로사(Barossa) 지역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한국을 찾은 카셀라 패밀리 브랜즈의 존 카셀라, 사진: 안미영]
얼마 전 피터 르만을 운영하는 카셀라 패밀리 브랜즈(Casella Family Brands)의 소유주인 존 카셀라(John Casella)가 막내아들이자 브랜드 매니저인 프랭크 카셀라(Frank Casella)와 함께 한국을 찾았다. 카셀라 패밀리 브랜즈는 1969년 이탈리아 출신 이민자 가족이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에 설립한 와인 기업이다. 현재도 가족 경영으로 여러 호주 와인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으며, 대중적인 와인으로는 옐로우 테일(Yellow Tail), 프리미엄 와인으로는 피터 르만이 대표적이다.
피터 르만의 이름이 바로사 와인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호주 와인 산업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던 1970년대 후반이다. 당시 남호주는 적포도의 과잉 공급으로 와이너리들이 포도 매입을 중단하는 상황이 벌어지며 재배자들이 어려움을 겪었다. 1979년, 대형 와이너리에서 일하던 와인메이커 피터 르만은 위기 속에서 직접 와이너리를 설립하는 결단을 내렸다. 그는 와인을 판매한 뒤 반드시 대금을 지급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재배자들의 포도를 매수해 첫 빈티지를 생산했다. 그의 와인은 성공을 거두었고, 약속대로 대금을 모두 지급하며 농부들의 재정적 어려움을 덜어줄 수 있었다. 당시 피터 르만의 행보는 바로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고, 이후 지역 와인의 품질 도약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그가 보여준 것은 공동체 정신이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돌아봤을 때, 더욱 의미 있게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은 와이너리와 농부들 사이의 인연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 함께했던 포도 재배자들 중에는 2세대와 3세대가 대를 이어 포도를 공급하며 소중한 파트너십을 이어가고 있는 이들이 있다.

[카셀라 패밀리 브랜즈의 아시아 퍼시픽 담당 매니저 제임스 윌슨, 사진: 안미영]
카셀라 패밀리 브랜즈가 피터 르만을 인수한 것은 2014년이다. 이번에 존 카셀라와 함께 한국을 찾은 아시아 퍼시픽 담당 매니저 제임스 윌슨(James Wilson)은 피너 르만이 호주 와인 산업에서 지닌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피터 르만의 결단은 바로사 와인 산업에 전환점이 됐습니다. 이후 지역을 대표하는 생산자로 자리매김해왔죠. 호주 와인 산업의 전설적인 이름인 만큼, 카셀라 패밀리 브랜즈는 큰 책임감을 가지고 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 유산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는 두 회사의 만남에서 가족 경영이라는 공통점이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덧붙였다. 피터 르만은 단순한 비즈니스를 넘어 설립 초기부터 장기적인 파트너십을 중시하는 철학을 이어왔고, 이러한 점이 같은 가족 경영 기업인 카셀라 패밀리 브랜즈와의 만남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방한을 기념해 마련된 디너는 장소부터 특별했다. 서울 수서동에 자리한 필경재는 조선시대에 지어진 전통가옥에서 한정식을 선보이는 공간이다. 피터 르만의 한국 수입사인 롯데칠성 측은 “피터 르만의 와인이 한식과도 좋은 페어링을 이룬다는 점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와인 역시 201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빈티지로 구성해 장기 숙성력을 경험할 수 있도록 했으며, 한국에 처음으로 선보이는 특별한 와인도 포함됐다.

[존 카셀라와 프랭크 카셀라, 사진: 안미영]
피터 르만은 바로사 전역에서 세부 지역의 특징과 토양, 미세기후를 반영해 다양한 스타일의 와인을 선보이고 있다. 첫 번째 와인으로 서빙된 위건 리슬링(Wigan Riesling) 2018은 해발 약 500m에 위치한 에덴 밸리 포도밭에서 생산됐다. 이 지역은 미네랄리티가 잘 드러나는 와인을 생산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5년간 병 숙성을 거친 뒤 출시하며, 시트러스 아로마와 미네랄에 긴 숙성에서 비롯된 복합미가 더해졌다. 페트롤 향이 과하지 않으면서도 산미가 돋보인다. 위건 리슬링은 와이너리 설립 초기부터 35년간 함께한 뒤 은퇴한 와인메이커 앤드류 위건(Andrew Wigan)의 이름을 딴 와인이다.
또 다른 화이트 와인 마가렛 세미용(Margaret Semillon) 2016은 피터 르만의 아내 마가릿을 기리는 와인으로, 리슬링과 달리 보다 따뜻한 산지에서 재배한 포도로 생산했다. 신선한 산도를 유지하기 위해 잠재 알코올 10~11% 수준에서 이른 수확을 진행했다고 한다. 병입 후 5년간 숙성한 뒤 출시되며, 이미 10년이 지난 빈티지임에도 입안에서 신선한 풍미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동시에 풍부한 질감과 바디감도 돋보인다. 이 와인은 출시 직후보다 5~6년 이상의 숙성을 거쳤을 때 더욱 복합적인 풍미를 드러내며 진가를 발휘한다. 피터 르만 측은 20년 이상의 장기 숙성도 가능한 와인으로 보고 있다. 위건 리슬링과 마가렛 세미용 모두 오크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와인에서 느껴지는 복합미는 긴 병 숙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피터 르만 와인들, 사진: 안미영]
레드 와인으로는 세 가지 쉬라즈를 선보였다. 그중 첫 번째로 서빙된 8 송즈 쉬라즈(8 Songs Shiraz) 2021은 피터 르만의 상징적인 스톤웰 쉬라즈와 같은 결의 와인이지만, 보다 이른 시기에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도록 만든 와인이다. 묵직한 쉬라즈의 전형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생동감 있는 과실향에 은은한 삼나무 향이 어우러지며 밝고 부드러운 스타일을 보여준다. 프렌치 오크에서 18개월간 숙성했다. '8 Songs'는 예술을 사랑했던 피터 르만 부부가 즐겨 들었던 음악극 'Eight Songs for a Mad King'에서 영감을 받아 붙인 이름이다.
와이너리를 대표하는 쉬라즈로 꼽히는 스톤웰 쉬라즈(Stonewell Shiraz) 2010은 피터 르만이 바로사 밸리 쉬라즈의 깊은 풍미와 강렬한 인상을 표현하기 위해 만든 최상급 와인이다. 바로사 전역의 세부 지역에서 엄선한 포도를 사용하는데, 그중에서도 스톤웰의 포도는 피터 르만이 '작고 검은 보석(Little Black Jewels)'이라 표현했을 만큼 작고 진하며 농축미가 뛰어나 높은 집중도를 보여준다. 이 와인은 프렌치 오크에서 18개월 숙성한 뒤 약 5년간 병 숙성을 거쳐 출시된다. 약 16년의 숙성을 거쳤음에도 여전히 신선하고 풍부한 과일 아로마가 살아 있으며, 잘 숙성된 풍미가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정교한 타닌과 뛰어난 구조감도 인상적이다. 이에 대해 제임스 윌슨 매니저는 “스톤웰 쉬라즈는 약 15년 정도 숙성됐을 때 특히 훌륭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 와인과 한식 떡갈비의 페어링을 추천했다.

[피터 르만 마스터슨 2018, 사진: 안미영]
피터 르만의 아이콘 와인은 스톤웰이지만, 이날은 마지막으로 '슈퍼 아이콘'으로 소개한 와인이 등장했다. 바로 마스터슨(Masterson) 2018이다. 이 와인은 카셀라 패밀리 브랜즈가 피터 르만을 인수한 이후, 존 카셀라가 '싱글 빈야드에서 최상급 바로사 쉬라즈를 만들겠다'는 비전을 바탕으로 2015년 처음 생산해 2019년 출시했다. 이번에 한국에 소개된 2018 빈티지는 두 번째로 생산된 마스터슨이다. 10년에 3~4회 정도, 뛰어난 빈티지에만 약 2,000병 한정 생산되는 와인으로, 이번 존 카셀라의 방한을 계기로 한국에 처음 선보였다. 2,500L 용량의 푸드르에서 41개월간 숙성한 뒤 병입 후 1년 이상의 추가 숙성을 거쳐 출시된다. 훌륭한 산도와 부드러운 타닌, 탄탄한 구조감, 그리고 긴 여운까지 바로사 쉬라즈가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모습을 담아냈다. 피터 르만의 정통성과 바로사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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