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도와 나파 밸리, 두 곳은 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와인 산지로 꼽힌다. 한 곳은 오랜 역사와 테루아 중심의 와인 문화가 있고, 또 다른 한 곳은 상대적으로 역사는 짧지만 현대 와인의 흐름을 바꾼 산지이기 때문이다. 크리스티앙 무엑스(Christian Moueix)는 이 두 산지를 잇는 거장이다. 그는 보르도 우안의 샤토 페트뤼스(Château Petrus)를 1970년부터 38년간 이끌었고, 1983년 나파 밸리에 도미누스 에스테이트(Dominus Estate)를 설립해 보르도의 양조 철학을 새로운 땅에 구현했다. 2008년에는 나파 밸리 오크빌(Oakville)에 율리시스(Ulysses)를 설립했으며, 현재도 보르도 포므롤과 생떼밀리옹에 8개의 샤토를 운영하고 있다.
보르도와 나파 밸리를 아우르는 세계적인 와인메이커 크리스티앙 무엑스가 최근 한국을 찾았다. 그는 나라셀라 도운에서 기자들과 만나 율리시스 와인을 소개하고, 드라이 파밍 농법과 미니멀리즘 양조 방식을 중심으로 자신의 와인 철학과 균형에 대한 관점을 전했다.

[한국을 찾은 크리스티앙 무엑스, 사진: 안미영]
그는 세계 와인 산업이 변화해온 수십 년간 무엑스 가문의 전통을 이어가면서도, 자신의 철학을 유연하게 확장해왔다. 그의 아버지 장 피에르 무엑스(Jean-Pierre Moueix)는 20세기 후반 보르도 와인 산업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무엑스 가문은 포므롤을 중심으로 뛰어난 메를로 기반 와인을 세계 무대에 알렸다. 크리스티앙 무엑스는 이러한 배경에서 성장해 파리에서 농공학 학위를 취득한 뒤 미국 캘리포니아 UC 데이비스(UC Davis)에서 포도재배학을 수학했고, 샤토 페트뤼스에서 자신의 와인 철학을 구체화했다. 이후 무엑스 가문의 보르도 사업을 넘어 자신만의 와이너리를 설립하기로 결심했을 때, 그는 나파 밸리를 선택했고 욘트빌(Yountville)에서 도미누스 에스테이트를 시작했다. 그는 나파 밸리 안에서도 미세한 테루아 차이에 주목했고, 이후 욘트빌에 인접한 오크빌의 역사적인 부지 찰스 호퍼 랜치(Charles Hopper Ranch)에 율리시스를 설립했다.
“1980년대 이후 나파 밸리는 세부 AVA들이 차례로 인정되면서 지역별 테루아 개념이 정교해졌습니다. 마치 보르도 메독에 마고, 생줄리앙, 포이약, 생테스테프 같은 지역이 자리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이었죠. 나파 밸리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서로 인접한 욘트빌과 오크빌의 차이에 대해 늘 궁금증이 있었습니다. 제가 UC 데이비스에서 공부하던 당시에는 러더포드(Rutherford)가 가장 주목받는 지역이었습니다. 이후 사람들의 관심은 오크빌로 옮겨갔고, 로버트 몬다비 와이너리와 오퍼스 원의 영향으로 오크빌은 더욱 중요한 산지로 자리잡게 됐습니다. 오크빌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어느 날, 한 목장 주인과 저녁 식사를 하게 됐고 그 자리에서 거래가 성사돼 포도밭을 인수하게 됐습니다.”
그가 약 40에이커의 포도밭을 구입하며 율리시스의 소유주가 된 것은 2008년 8월. 도미누스 이후 약 30여 년 만에 선보인 두 번째 나파 밸리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인수 당시 포도밭의 이름은 슈미트 랜치(Schmitt Ranch)였는데, 그는 새로운 이름을 고민하던 중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Odyssey)>의 주인공 오디세우스에서 영감을 얻었다. 영어식 이름인 '율리시스'는 긴 여정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영웅을 상징한다. 와인 라벨에 활을 든 인물이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율리시스는 오랜 여정 끝에 자신의 특별한 활을 사용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유일한 사람으로 인정받는데, 그 강인함과 귀환의 상징성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율리시스의 이야기는 보르도에서 시작해 나파로 이어진 크리스티앙 무엑스의 와인 여정과도 닮아 있다.

[율리시스의 포도밭 전경, 제공: 나라셀라]
샤토 페트뤼스를 만든 전설적인 와인메이커에게 또 다른 메를로 와인을 기대할 법하지만, 그는 나파 밸리에서 같은 철학을 다른 품종으로 구현하며 포도밭 면적의 약 90%에서 카베르네 소비뇽을 재배한다. 마야카마스 산맥 기슭에 펼쳐진 율리시스 빈야드는 자갈이 많은 점토질 양토로 배수가 잘되며, 카베르네 소비뇽을 재배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그가 오크빌의 포도밭을 인수할 당시, 이곳은 관개에 의존해 관리되고 있었다고 한다. 이는 그의 철학과 완전히 반대되는 방식이었다. 그가 강조하는 중요한 원칙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드라이 파밍', 즉 인위적 관개를 하지 않는 농법이다. 이는 지속가능성과도 연결된다.
“지속가능하다는 것은 자연의 섭리에 맞고 자연과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물을 공급하는 방식은 제가 생각하는 균형과 다릅니다. 기후 변화로 전 세계 와인 산지가 점점 따뜻해지고 있기 때문에 보르도에서도 관개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는데,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포도나무는 사람과도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충분한 물을 쉽게 얻으면 스스로 깊이 뿌리를 내릴 필요가 없어집니다. 관개를 하는 포도밭의 포도나무는 뿌리가 50센티미터 정도에 머무는 반면, 드라이 파밍은 포도나무가 토양 깊은 곳의 수분을 찾도록 만들어 뿌리를 5~6미터까지 깊게 내리게 합니다. 사실 관개는 너무 쉬운 방식이죠. 물을 주면 포도나무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니까요. 그렇게 하면 포도알이 커지고 생산량도 많아지지만, 포도나무가 테루아에서 에너지를 얻는 게 아니라 사람이 준 물에 의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와인의 품질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빈야드에 선 크리스티앙 무엑스, 제공: 나라셀라]
그는 율리시스 빈야드를 인수한 뒤 토양과 미세기후를 이해하기 위한 작업을 거쳐 포도밭을 재정비하고, 포도나무를 다시 심었다. 이미 관개 중심으로 자란 포도나무에 갑자기 관개를 중단하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래서 그는 생산자들에게 처음부터 드라이 파밍을 고려할 것을 권한다. 이는 물 부족이 현실화되는 환경 속에서 지속가능성을 위한 첫 단계이기도 하다. 그가 나파 밸리에서 선구적으로 진행한 드라이 파밍은 이후 다른 생산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드라이 파밍에 관한 그의 철학은 오랜 세월 동안 포도나무를 지켜보고 깊이 이해한 시간에서 비롯됐다. 그는 종종 포도나무를 사람에 비유하며 “매우 복잡한 삶을 살아가는 개별적 존재”로 묘사했다. “제가 포도밭을 관리한 38년 동안 각각의 포도나무를 가지치기하고, 수확하며 어떤 방식으로든 함께했기에 저는 포도나무를 알고 있고 특별한 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구온난화가 현실이지만 저는 포도나무가 가뭄 상황에서도 잘 견디고 적응할 만큼 똑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의 양조 철학을 설명하며 드라이 파밍과 함께 '최소한의 개입'이 의미하는 바를 풀어냈다. “50년이 넘는 제 와인 인생 동안 제 철학은 언제나 와인 그 자체를 존중하는 것이었습니다. 저에게 와인 양조는 본질적으로 자연적인 과정이며, 사람이 그 과정에 지나치게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젊었던 1960년대에는 '와인메이커'라는 개념이 지금처럼 뚜렷하지 않았습니다. 포도즙이 와인으로 변하는 과정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고, 때로는 문제가 생기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잘 진행됐습니다. 이런 접근을 우리는 '미니멀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미니멀리즘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곧 제품에 대한 존중이기 때문입니다. 양조 과정에서 과도한 추출을 하기 시작하는 순간, 오히려 와인의 본질을 손상시킬 수 있습니다.”
율리시스에서 양조팀은 그의 철학에 따라 모든 과정을 세심하게 관찰하되, 개입은 절제한다. 매일 포도밭을 살피며 수확 시기를 신중하게 결정하고, 최적의 시점에 손 수확을 진행한다. 보르도에서 포도 선별을 엄격한 수준으로 끌어올린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받는 그는, 율리시스에서도 두 단계의 정밀한 선별 과정을 거친 포도만 양조에 사용한다.
율리시스는 2012년 첫 빈티지를 생산했지만 2013년까지는 생산량이 적었고 2014년부터 본격적인 생산이 시작됐다. 그와 함께한 버티컬 테이스팅에서는 2014, 2016, 2018, 2021 빈티지를 시음했다. 빈티지에 따라 블렌딩 비율은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90% 이상의 카베르네 소비뇽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카베르네 프랑과 쁘띠 베르도를 블렌딩했다. 프렌치 오크 배럴에서 18개월 숙성했으며 빈티지에 따라 새 오크 비율은 약 40~45% 정도를 사용한다.

[크리스티앙 무엑스가 포도 재배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 사진: 안미영]
2014년은 드라마가 있었던 해였다. 건조한 겨울에 이어 2월엔 폭우가 쏟아졌고, 봄에도 강우가 이어졌다. 7월에는 짧은 폭염이 있었으나 이후 안정적으로 숙성이 진행됐다. 크리스티앙 무엑스는 여기에 한 가지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해 8월 24일, 북부 캘리포니아를 강타한 규모 6.0의 지진이었다. 수확시기가 되면 포도밭을 걸어다니며 포도알을 맛보고 완숙도를 확인하는데, 그는 지진 전후로 미세하게 포도의 맛이 달라진 것을 느꼈다고 했다. 좋은 변화였다. 땅이 움직이며 지하 토양에 균열을 준 것이 포도에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셈이다. '지진의 빈티지'인 율리시스 2014는 검은 과실 향과 함께 깊은 삼나무, 담뱃잎, 흑연의 풍미가 이어진다. 묵직한 타닌 속에서도 생동감이 느껴지는 와인이다. 그는 이것이 율리시스의 차별점이라고 설명했다. 욘트빌에 자리한 도미누스와 오크빌에 자리한 율리시스는 약 1.5km 떨어져 있고 재배 방식은 완전히 같은데, 율리시스에서 좀 더 강한 집중도와 생동감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기술적으로는 “pH가 약간 낮고, 산도가 조금 더 높다”고 설명할 수 있다.
율리시스 2016년 와인은 2014년보다 더 성숙하면서 풍성한 모습을 보여줬다. 비가 잦고 평년보다 따뜻한 겨울로 시작된 빈티지로, 8월에 서늘한 기후로 숙성이 조금 늦었지만 9월에 따뜻해지며 좋은 조건에서 숙성이 진행됐다. 와인은 부드럽고 매혹적인 스타일이다. 검붉은 과실 풍미에 초콜릿, 정향, 허브 등의 뉘앙스가 더해져 아름다운 복합미를 보여준다. 둥근 질감 속에서도 분명한 집중도가 느껴진다. 숙성 잠재력도 매우 뛰어난 빈티지로 평가받고 있으며, 크리스티앙 무엑스는 이 빈티지가 자신이 추구하는 철학에 가까운 와인이라고 소개했다.
2018년은 나파 밸리 최고의 빈티지 중 하나로 꼽히는 해다. 강우량이 평년보다 적었고 늦여름 기온이 평년보다 낮았으며 수확기에 다가올 즈음 아침 안개의 영향으로 포도가 천천히 익었다. 그는 율리시스 2018년산을 시음하며 '균형'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실 그는 1973년부터 샤토 페트뤼스에서 그린 하베스트를 시작했다. 당시에는 큰 논란이 될 만큼 드문 방식이었다. “2018년 빈티지에서 힘과 우아함이 함께 느껴진다면 그것은 균형 덕분입니다. 그리고 그린 하베스트가 균형을 맞추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이란, 본질적으로 매우 섬세하다. 율리시스 2018이 뛰어난 빈티지로 손꼽히는 이유 역시 순수함과 균형감을 인상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향에서는 깊은 집중도가 느껴지고, 풍성한 과실 아로마와 섬세한 타닌이 조화를 이룬다. 긴 여운에는 미네랄 뉘앙스도 이어진다. 이상적인 기후 조건과 함께 재식재 이후 포도나무의 수령이 조금 높아지며 뿌리가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고, 율리시스가 더욱 완성도 높은 모습을 보여준 빈티지다.
2021년은 강우량이 적어 매우 건조했고, 기온 역시 평년보다 높은 해였다. 포도나무는 수분 스트레스를 경험했고, 응축된 풍미는 와인의 농축미로 이어졌다. 다른 빈티지에 비해 잘 익은 과실에서 오는 풍부한 뉘앙스가 돋보이는 와인이다. 2021년 빈티지는 나파 밸리 와인이라는 정체성이 더욱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에너지가 인상적인 와인인 만큼 앞으로 변화할 모습도 기대할 만하다.

[율리시스 2014, 2016, 2018, 2021 빈티지, 사진: 안미영]
현재 율리시스에서는 단 하나의 와인만 생산하고 있다. 포도나무의 수령은 아직 젊은 편이지만, 그는 적절한 시점이 오면 세컨드 와인을 선보일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다고 했다. 동시에 자신의 프로젝트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도 밝혔다. “율리시스를 설립하고 이름을 붙일 당시엔 이것이 제 인생의 마지막 여정이 될 것이라 생각했죠. 하지만 마지막이 되진 않았습니다. 지난해 또 다른 포도원을 매입했고, 86에이커 규모의 큰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포도원을 발전시키려면 시간이 필요하죠.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그 프로젝트를 보여드릴 수 있길 바랍니다.”
그는 율리시스 와인을 묘사하는 중요한 표현으로 “intensity”을 사용했다. 다만 단순히 강도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강렬함이 아니라, 내부에 축적된 집중도와 존재감에 가까운 개념이었다. 그와 함께 율리시스의 네 가지 빈티지를 시음하는 동안 자연스레 떠오른 키워드는 '품격'이었다. 오랜 시간 테루아를 탐구해온 크리스티앙 무엑스는 결국 자신과 닮은 와인을 만들어가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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