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이켄 드롭 스토퍼, 사진: 정수지]
거위는 한곳에 머물지 않는다. 2002년 아우렐리오 몬테스(Aurelio Montes)가 안데스를 넘어 아르헨티나 멘도사(Mendoza)에서 새로운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 택한 이름도 산맥을 오가는 새, 카이켄(Kaiken)이었다.
20여 년이 흐른 지금, 그 거위는 비스탈바의 오래된 포도나무에서 구알타야리와 로스 차카예스의 고지대, 거대한 바위가 뒤덮인 극단적인 구획과 멘도사 북쪽 카노타까지 날아갔다. 그리고 이동할 때마다 와인의 표정도 달라졌다. 카이켄이 변덕스러운 것이 아니다. 멘도사가 그만큼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카이켄을 따라가면 지난 20여 년 동안 아르헨티나 와인이 얼마나 더 세밀하게 자신의 땅을 읽어왔는지도 함께 보인다.

[비스탈바 포도밭, 사진: 정수지]
오래된 멘도사를 버리지 않는다
카이켄의 출발점인 비스탈바(Vistalba)는 루한 데 쿠요에서도 멘도사 현대 와인 산업의 역사가 깊게 축적된 곳이다. 카이켄의 포도밭에도 그 시간이 남아 있다. 가장 오래된 구획은 1910년 식재됐고, 1940년대에 조성된 카베르네 소비뇽 포도밭에는 당시 멘도사에서 널리 사용하던 페르골라(pergola) 재배 방식이 여전히 남아 있다. 우코 밸리의 높은 고도와 세분화된 테루아가 오늘날 멘도사의 새로운 얼굴이라면, 비스탈바는 카이켄이 그보다 오래된 멘도사의 자산을 어떻게 이어가는지를 보여주는 곳이다.
오래된 포도밭을 보존한다는 건 그대로 내버려둔다는 뜻이 아니다. 페르골라는 넓은 캐노피를 만들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VSP보다 많은 포도를 생산할 수 있지만, 카이켄의 오래된 카베르네 소비뇽 포도나무는 척박한 토양에서 헥타르당 5톤 이하의 낮은 수확량을 낸다. 대신 넓게 펼쳐진 잎이 강렬한 햇빛으로부터 포도송이를 보호한다. 여기에 기존의 범람 관개만 고집하지 않고 점적 관개를 도입해 포도나무의 수세(vigor)와 포도 성숙의 균형을 보다 정밀하게 관리한다.

[카이켄 와인들, 사진: 정수지]
이 포도밭에서 만드는 카이켄 울트라 카베르네 소비뇽(Kaiken Ultra Cabernet Sauvignon) 2023을 두고 카이켄이 강조한 단어도 '힘'보다는 균형과 일관성이었다. 오래된 포도나무가 주변 환경과 균형을 이루면서 빈티지에 따른 생산량과 성숙도의 편차가 상대적으로 적다는 설명이다. 실제 와인에서는 블랙체리와 블랙커런트, 블랙베리 위로 민트와 피망, 담배와 흑연이 겹치고, 상당한 양의 타닌은 벨벳 같은 질감을 보였다. 오래된 재배 방식과 현대적인 포도밭 관리가 반드시 서로 반대편에 대치하는 게 아니라는 좋은 사례다.
비스탈바의 시간을 더욱 멀리 거슬러 올라가는 와인이 카이멘 카이(Kaiken MAI) 2022다. 100% 말벡으로 만든 카이켄의 상징적인 와인으로, 100% 프랑스산 오크에서 18개월 숙성하며 절반은 새 오크를 사용한다. 잘 익은 흑자두와 말린 자두에 신선한 고기와 말린 육류, 버섯과 스모크 같은 짙고 성숙한 향이 겹치지만, 입에서는 예상보다 생생한 붉은 과실이 살아나고 타닌은 유연하다. 농축도만으로 오래된 포도나무의 가치를 설명하기보다 농밀함 속에서도 균형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카이켄이 비스탈바에서 찾고 있는 오래된 멘도사의 표정에 가깝다.
카이켄의 거위는 여기에서 더 높은 곳으로 날아간다. 하지만 새로운 땅을 찾아간다고 해서 오래된 땅을 버리지는 않았다. 비스탈바는 카이켄에게 과거가 아니라, 계속 관리하고 다시 해석해야 할 현재의 포도밭이다.

[카이켄 와인들, 사진: 정수지]
더 높은 곳으로, 우코 밸리
비스탈바가 카이켄의 출발점이라면, 다음 행선지는 우코 밸리(Valle de Uco)였다. 지난 수십 년간 멘도사의 프리미엄 와인 지형도 이와 비슷하게 움직였다. 루한 데 쿠요의 오래된 포도밭이 여전히 중요한 자산으로 남아 있는 가운데, 생산자들의 시선은 더 높은 고도와 큰 일교차, 다양한 충적 선상지를 지닌 우코 밸리로 넓어졌다. 그리고 관심의 단위도 '우코 밸리'에서 구알타야리(Gualtallary), 알타미라(Altamira), 로스 차카예스(Los Chacayes)처럼 더 작은 산지로 세분화됐다.
카이켄 울트라 말벡(Kaiken Ultra Malbec) 2023은 이러한 이동을 한 병에 담는다. 구알타야리, 알타미라, 로스 차카예스의 포도를 함께 사용해 하나의 포도밭을 강조하기보다 서로 다른 우코 밸리의 특성을 조합한다. 블랙베리와 블루베리, 자두 같은 짙은 과실에 초콜릿과 오크가 겹치고, 상대적으로 서늘했던 2023년답게 산도는 높고 선명하다. 다만 추출도 상당하다. 가루처럼 촘촘한 타닌 뒤로 약간의 쓴맛이 남고, 시간이 지나면서 말린 꽃 향이 올라왔다.
이 지점이 오히려 흥미롭다. 고도와 서늘함이 곧 가볍고 우아한 와인을 의미하진 않았다. 포도가 자란 환경만큼 추출과 숙성이라는 양조 선택도 최종 스타일을 결정한다. 카이켄의 우코 밸리 진출 역시 단순히 '더 높은 곳으로'의 이동으로만 읽을 수 없는 이유다. 이제 카이켄의 관심은 고도를 넘어 우코 밸리 안에서도 땅이 어떻게 다른가로 향한다. 그 차이가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곳이 로스 차카예스다.

[카이켄 포도밭 토양, 사진: 정수지]
로스 차카예스, 이제 산지가 아니라 돌을 본다
우코 밸리까지 올라왔다면 다음 질문은 더 작아진다. 같은 로스 차카예스 안에서도 땅은 얼마나 다를까. 카이켄의 핀카 아로요 그란데(Finca Arroyo Grande)는 그 질문을 지질학의 영역까지 끌고 간다. 포도밭을 가로지르는 아로요 그란데를 중심으로 차카예스 수르(Chacayes Sur)와 노르테(Chacayes Norte)가 나뉘고, 그 안에서도 유난히 거대한 암석이 집중된 작은 구획이 존재한다. 카이켄이 '볼더(Boulder)'라고 부르는 곳이다.
이 돌들은 한 종류가 아니다. 카이켄이 현장에서 제시한 지질 자료를 보면 화강질 암석과 화강섬록암, 변성암 등 서로 다른 지질학적 기원을 지닌 암석이 뒤섞여 있다. 안데스에서 침식된 이 암석들은 계곡을 따라 이동하고 아로요 그란데의 운반과 퇴적 작용을 거치며 한 포도밭에 모였다. 멀리서 보면 하나의 포도밭이지만, 발밑의 돌을 들여다보면 그 기원과 구성은 훨씬 복잡하다.

[카이켄 지역별 토양 샘플, 사진: 정수지]
이처럼 복잡한 지질은 단순히 암석 이름의 목록으로 끝나지 않는다. 거대한 바위가 포도밭을 차지하면서 포도나무가 살아갈 물리적 환경 자체가 달라진다. 토양의 깊이와 뿌리가 뻗을 수 있는 공간이 제한되고, 물이 이동하고 머무는 방식도 주변 구획과 달라진다. 실제 볼더 구획에는 사람이 쉽게 옮길 수 없는 크기의 바위가 곳곳에 박혀 있어 포도밭을 정리하고 포도나무를 일정한 줄로 심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카이켄은 이곳에서 느껴지는 흑연과 부싯돌 같은 감각을 이러한 지질적 특성과 연결해 설명한다. 그러나 암석의 성분이 그대로 와인의 특정 향이나 '미네랄 맛'으로 전달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분명한 것은 이 극단적인 환경이 뿌리의 생장과 수분 이용, 포도나무의 활력에 영향을 미치고, 결국 재배 방식까지 바꾸게 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볼더의 이야기는 '돌의 맛'보다 돌 때문에 사람이 포도밭을 대하는 방법을 바꿔야 했다는 데서 시작한다.

[거대한 암석이 있는 볼더 포도밭, 사진: 정수지]
포도밭이 사람에게 양보하지 않은 와인
이 구획을 카이켄은 “The most hostile sector of the property”, 농장에서도 가장 가혹한 곳이라고 표현한다. 거대한 바위 때문에 일반적인 VSP 방식으로 줄을 맞춰 포도나무를 심기 어려웠고, 일부 지역은 아예 식재를 포기해야 했다. 카이켄이 택한 방법은 땅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재배 방식을 바꾸는 것이었다. 바위 사이에 포도나무가 자리 잡을 수 있는 곳을 찾아 말벡과 카베르네 프랑, 프티 베르도를 고블레 방식으로 심었다. 땅을 포도나무에 맞춘 것이 아니라 포도나무를 땅에 맞춘 셈이다.

[카이켄 불더 와인, 사진: 정수지]
세 품종은 숙기가 비슷해 함께 수확하고 공동 발효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카이켄 볼더(Kaiken Boulder) 2022는 검은 과실의 농축도만큼이나 향의 층위가 인상적이었다. 블랙베리와 블루베리에 흑연과 부싯돌을 연상시키는 서늘한 뉘앙스가 겹치고, 타임과 로즈마리 같은 야생 허브와 스파이스가 이어졌다. 입에서는 상당한 볼륨과 밀도를 보이며 두텁고 단단한 타닌을 예리한 산도가 받친다. 피니시에는 스파이스와 함께 건조한 돌을 연상시키는 감각과 짭짤한 여운이 길게 남았다.
생산자는 이러한 감각을 볼더의 지질과 연결해 설명하지만, 이 와인에서 더 주목할 부분은 돌의 성분이 어떤 풍미를 만들었느냐가 아니다. 바위가 재배 방식을 결정하고, 그 재배 방식이 결국 와인의 설계까지 바꾸었다는 사실이다. 카이켄이 이곳에서 내세우는 문장, “자연이 스스로를 표현하도록 둔다(We let Nature express herself)”도 그래서 단순한 테루아 마케팅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카이켄 포도나무, 사진: 정수지]
햇빛 아래 남겨둔 카베르네 프랑의 초록빛
카베르네 프랑을 다루는 방식에서는 멘도사의 강한 햇빛이 오히려 하나의 양조·재배 변수가 된다. 이 품종의 피망이나 풋고추, 허브 계열 향에 관여하는 메톡시피라진(methoxypyrazine)은 포도의 성숙과 햇빛 노출이 진행되면서 감소한다. 일조량이 풍부한 멘도사에서는 따라서 피라진을 어떻게 없앨 것인가보다 얼마나 남길 것인가가 카이켄의 고민이다.
카이켄은 포도송이 주변의 잎을 지나치게 제거하지 않고 어느 정도 그늘을 유지한다. 강한 직사광선으로 피라진이 지나치게 감소하는 것을 막아 카베르네 프랑의 품종적 개성을 보존하기 위해서다. 목표는 풋내가 지배적인 와인이 아니라 잘 익은 과실 사이로 허브와 향신료의 뉘앙스가 살아 있는 와인이다. 같은 품종이라도 서늘한 기후에서 미숙한 피라진을 줄이려는 재배와는 출발점이 반대인 셈이다.
카이켄 울트라 카베르네 프랑(Kaiken Ultra Cabernet Franc) 2023에서는 그 의도가 비교적 선명하다. 알타미라와 로스 차카예스의 포도를 사용하며 피망과 파프리카, 허브가 블랙체리와 자두, 붉은 과실 사이로 드러난다. 흑연과 후추, 흙을 연상시키는 풍미가 더해지고 산도는 예리하다. 입에서는 짭짤한 감각과 함께 상당히 단단한 타닌이 구조를 잡는다. 카베르네 프랑의 '초록색'을 지우기보다 와인의 한 요소로 남겨둔 스타일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것이 카이켄 프랭클리(Kaiken Frankly) 2022다. 로스 차카예스의 'Block 7'에서 나온 100% 카베르네 프랑으로 만든 두 번째 빈티지로, 여러 산지를 조합하는 울트라(Ultra)보다 특정 구획의 표현에 초점을 맞춘다. 체리 리큐르 같은 농축된 과실을 중심으로 흑연과 민트, 야생 타임 등이 층을 이루고 스파이스가 강하게 올라온다. 입에서는 건조하고 단단한 타닌이 선명하게 남는다.
두 와인은 카이켄이 카베르네 프랑을 다루는 방향을 잘 보여준다. 햇빛이 풍부하다고 무조건 더 노출시키는 것이 아니라, 캐노피를 이용해 빛을 조절하고 품종이 가진 허브의 목소리를 의도적으로 남긴다. 멘도사의 카베르네 프랑이 흥미로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충분히 익은 과실과 높은 일조량을 가지면서도, 재배자의 선택에 따라 카베르네 프랑 특유의 허브와 스파이스를 잃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카이켄 와인들, 사진: 정수지]
같은 샤르도네, 다른 표정
카이켄이 산지의 차이를 읽는 방식은 적포도에만 머물지 않는다. 카이켄 디비나 샤르도네(Kaiken Divina Chardonnay) 2024와 카이켄 울트라 샤르도네(Kaiken Ultra Chardonnay) 2024를 나란히 시음하면 같은 품종으로도 상당히 다른 방향을 택하고 있다는 사실이 선명해진다.
새롭게 선보인 디비타 샤르도네 2024는 로스 차카예스의 샤르도네 100%로 만든다. 잘 익은 사과와 풋사과, 복숭아에 마카다미아와 잣 같은 견과류, 은은한 오크와 스파이스가 겹친다. 하지만 이 와인의 중심은 향보다 질감에 있다. 높고 예리한 산도가 뼈대를 세우는 가운데 중고 배럴 숙성과 바토나주에서 얻은 크림 같은 질감과 앙금의 뉘앙스가 중상의 바디를 채운다. 피니시에는 뚜렷한 짠맛이 남는데, 카이켄은 이를 로스 차카예스의 석회질 토양과 연결해 설명한다. 토양의 탄산칼슘이 와인에 직접 짠맛을 전달한다고 단정하기보다, 이곳에서 카이켄이 감각적으로 포착한 테루아의 특징으로 이해하는 편이 적절하다.
반면 한국 시장에도 이미 알려진 울트라 샤르도네 2024는 훨씬 풍만하다. 구알타야리를 중심으로 한 포도에서 파인애플과 망고, 황도 같은 잘 익은 과실이 먼저 나오고 바닐라와 코코넛, 토피와 스파이스가 뒤따른다. 입에서는 점성이 느껴질 만큼 유질감이 있지만 와인이 무겁게 주저앉지는 않는다. 긴장감 있는 산도가 끝까지 살아 있고, 피니시에는 샤르도네 특유의 페놀릭 그립이 남아 풍부한 과실과 오크에 윤곽을 만들어준다.
그래서 디비나(Divina)를 단순히 울트라(Ultra)보다 높은 등급의 샤르도네로 읽는 것보다 서로 다른 방향의 두 샤르도네로 보는 편이 흥미롭다. 울트라가 잘 익은 과실과 오크, 볼륨 속에서 산도가 균형을 잡는다면, 디비는 산도와 짠맛, 앙금 숙성에서 얻은 질감을 앞세운다. 카이켄이 화이트 와인에서도 이제 단순히 '멘도사의 샤르도네'를 만드는 데서 벗어나 산지와 양조를 조합해 서로 다른 질감을 설계하기 시작했다는 변화가 두 잔 사이에서 보인다.

[카이켄 숙성실, 사진: 정수지]
거위는 더 북쪽으로, 카노타까지
카이켄의 탐색은 우코 밸리에서 끝나지 않았다. 멘도사 시에서 북서쪽으로 약 35km, 라스 에라스(Las Heras)의 카노타 밸리(Valle de Canota)는 빌라비센시오 자연보호구역과 인접한 프리코르디예라의 작은 계곡이다. 해발 약 1,150m에 자리한 이곳은 우코 밸리의 전형적인 충적 선상지와도 성격이 다르다. 카이켄은 토양을 건조하고 투수성이 높은 비충적성 토양으로 설명하며, 판상으로 갈라지는 점판암류가 풍부하다는 점을 특징으로 꼽는다. 아르헨티나 지질조사 자료에서도 카노타 일대에는 점판암(pizarra)을 포함한 오래된 암석층이 확인된다.
이곳에서 특히 눈에 띄는 건 빠른 성숙이다. 카이켄 역시 카노타를 우바스 데 프리미시아(uvas de primicia), 즉 일찍 익는 포도를 얻는 지역으로 규정한다. 낮에는 멘도사 평균보다 다소 높은 기온을 보이지만 일교차가 커 당 성숙이 빠르게 진행된다는 설명이다. 현장에서 들은 설명에 따르면 다른 포도밭보다 수확이 약 한 달 빠르고, 누드 로제(Nude Rosé) 2026에 사용한 그르나슈는 2월 첫째 주에 수확해 3월 말 병입을 마쳤다.
카이켄 누드 로제(Kaiken Nude Rosé) 2026은 그르나슈 90%에 카베르네 소비뇽 10%를 더한다. 라즈베리와 딸기, 석류처럼 선명한 붉은 과실에 허브와 오렌지, 오렌지 껍질을 연상시키는 향이 겹치고, 부드러운 질감과 조화로운 산도가 이어진다. 과실의 강도가 충분하고 지나치게 가볍지 않아 단순한 여름용 로제 이상의 무게감을 갖는다. 여기서 10%의 카베르네 소비뇽이 재미있다. 카이켄의 설명에 따르면 그르나슈만으로 만들 경우 시간이 지나면서 색이 빠르게 변할 수 있어, 카베르네 소비뇽의 페놀과 타닌을 이용해 색 안정성을 높인단다. 단순히 맛을 더하기 위한 블렌딩이 아니라 로제가 시장에서 신선한 색을 유지하도록 고려한 기술적 선택인 셈이다.
그리고 빠른 수확은 시장에서도 뜻밖의 장점을 만든다. 2월 초 포도를 따고 3월 말 병입하면 북반구의 그르나슈가 그해 수확을 맞기도 전에 남반구에서는 같은 빈티지의 로제를 시장에 내놓을 수 있다. 카노타는 카이켄에게 새로운 테루아인 동시에 새로운 시간표를 만들어주는 산지인 셈이다.

[포도나무 사이로 설치된 곤충 호텔, 사진: 정수지]
인증서보다 포도밭에서 보이는 것
카이켄의 지속가능성을 설명하는 데 인증 목록부터 꺼낼 필요는 없다. 비스탈바 포도밭을 걷다 보면 그 방향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포도밭에는 양과 말, 닭과 거위 같은 동물이 함께 살고, 거위들은 포도나무 사이를 돌아다니며 풀을 뜯는다. 곳곳에는 곤충이 머물고 번식할 수 있도록 만든 곤충 호텔이 놓여 있다. 포도밭의 생물다양성 안내판에는 이곳에서 볼 수 있는 토착 식물과 조류, 여우 같은 야생동물까지 기록돼 있다. 주변의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상황에서 포도밭을 하나의 농경지가 아니라 작은 생태계이자 피난처로 유지하려는 시도다.
농법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카이켄은 약 5년 전부터 유기농과 재생농업으로 전환하기 시작했고, 비스탈바에서는 유기농 인증을 받았다. 화학 비료 대신 퇴비와 같은 유기 자재를 사용하고, 포도밭의 생물다양성과 토양 환경을 함께 관리한다. 지속가능성 인증이 이러한 활동을 제도적으로 확인해준다면, 포도밭에서는 그 철학이 무엇을 남겨두고 무엇을 바꿀 것인가라는 구체적인 선택으로 나타난다.
그 철학은 앞서 본 볼더와도 이어진다. 거대한 돌을 제거해 땅을 표준화하는 대신 포도나무를 심는 방법을 바꾸고, 오래된 페르골라를 VSP로 갈아엎는 대신 점적 관개를 더해 수세를 관리한다. 포도밭의 동물과 야생 식생 역시 제거해야 할 방해물로만 보지 않고 생태계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결국 카이켄의 선택은 자연을 생산 방식에 맞추기보다, 주어진 환경을 읽고 재배 방식을 그에 맞춰가는 쪽으로 향한다.
20여 년 전 카이켄이라는 거위는 안데스를 넘어 새로운 땅을 찾아왔다. 이제 비스탈바에서는 진짜 거위들이 포도나무 사이를 오간다. 상징으로 시작했던 이름이 포도밭의 풍경과 묘하게 겹치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 사이 카이켄이 배운 것은 어쩌면 새로운 땅을 계속 찾아가는 법만이 아니라, 이미 찾은 땅과 함께 살아가는 법인지도 모른다.

[카이켄 양조장, 사진: 정수지]
와인메이커만 와인을 만드는가
카이켄의 산지 탐색이 조금 다른 방식으로 드러나는 와인도 있다. 디소비디언스(Disobedience)는 세계적인 아르헨티나 셰프 프란시스 말만(Francis Mallmann)과 함께 만든 레드 블렌드다. 유명 셰프와 와이너리의 협업이라는 사실보다 요리를 하는 사람이 와인의 구조를 함께 고민하면 무엇이 달라지는가가 궁금해진다.
말만은 음식과 와인의 '완벽한 조화'를 반드시 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둘 사이의 불협화음과 긴장도 즐긴다고 말한다. 실제로 이 와인을 만들 때도 정해진 품종이나 산지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초기 프로젝트에서는 멘도사의 서로 다른 품종과 산지에서 가져온 40종 이상의 와인을 함께 시음한 뒤 블렌드를 결정했고, 빈티지에 따라 구성도 달라진다.
디소비디언스(Disobedience) 2021은 비스탈바의 카베르네 소비뇽 40%와 메를로 20%, 로스 차카예스의 말벡 30%와 프티 베르도 10%로 구성된다. 30%는 새 프랑스산 오크, 나머지는 2~4회 사용한 프랑스산 오크에서 총 15개월 숙성한다. 잔에서는 두 산지와 네 품종을 하나로 묶은 이유가 어느 정도 읽힌다. 블랙베리를 비롯한 검붉은 과실이 밀도 있게 올라오고 가죽과 스모크, 달콤한 스파이스, 약간의 허브가 뒤따른다. 구조는 농밀하지만 타닌은 잘 익고 유연하며, 중상 정도의 산도가 무게를 받쳐준다. 2021년 1~2월이 직전 두 해보다 서늘해 수확이 다소 늦어졌고, 카이켄 역시 이 빈티지를 농축도와 함께 신선함과 우아함을 확보한 해로 설명한다.
앞에서 살펴본 카이켄의 다른 와인들이 '어디에서 재배할 것인가'와 '그 장소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를 보여줬다면 디소비디언스는 질문을 한 단계 바꾼다. 서로 다른 장소에서 얻은 성격을 어떤 목적을 위해 다시 조합할 것인가. 비스탈바의 오래된 포도밭과 로스 차카예스의 고지대가 한 병 안에서 만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 목적을 결정하는 사람이 반드시 와인메이커일 필요도 없다. 디소비디언스에서 셰프의 역할은 완성된 와인에 어울리는 음식을 찾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어떤 와인을 마시고 싶은지 결정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데 있었다. 그래서 이 협업은 유명 셰프의 이름을 붙인 마케팅보다, 카이켄이 멘도사에서 찾아낸 서로 다른 재료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방식으로 읽는 편이 더 흥미롭다.

[카이켄 숙성실, 사진: 정수지]
20여 년간 거위가 찾아낸 멘도사의 표정들
카이켄의 지난 20여 년을 따라가다 보면 아르헨티나 프리미엄 와인이 던지는 질문 자체가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한때 핵심이 '아르헨티나에서 좋은 말벡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였다면, 이제 질문의 해상도는 훨씬 높아졌다.
어느 계곡인가. 어느 고도인가. 같은 우코 밸리에서도 어느 선상지와 구획인가. 발 밑에는 어떤 암석이 놓여 있는가. 강한 햇빛 아래 캐노피는 얼마나 남길 것인가. 100년 된 페르골라는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그리고 말벡 너머에서 멘도사를 표현할 품종은 무엇인가. 카이켄의 포트폴리오가 넓어진 과정은 이런 질문이 하나씩 늘어난 시간과 겹친다.
그래서 카이켄의 변화는 단순한 신제품이나 산지 확장으로만 보기 어렵다. 비스탈바의 오래된 포도나무를 지키면서 우코 밸리로 올라갔고, 다시 로스 차카예스 안에서 구획과 돌의 차이를 들여다봤다. 카베르네 프랑에서는 햇빛과 캐노피의 관계를 조절하고, 샤르도네에서는 산지에 따라 질감을 달리했으며, 멘도사 북쪽 카노타에서는 새로운 품종과 수확 시기까지 시험한다. 한 와이너리가 이동한 궤적이 곧 지난 20여 년간 아르헨티나 프리미엄 와인이 장소를 이해하는 단위를 점점 작게 만들어온 과정과 겹쳐 보인다.
안데스를 넘는 새에서 이름을 얻은 카이켄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 다만 이제 그 움직임은 칠레에서 아르헨티나로 향했던 한 번의 긴 비행만을 뜻하지 않는다. 비스탈바의 오래된 포도나무에서 로스 차카예스의 거대한 돌밭으로, 다시 카노타의 낯선 계곡으로 이동하며 멘도사를 더 작고 정밀하게 읽어간다.
20여 년 전 카이켄이 발견한 것이 아르헨티나였다면, 지금 발견하고 있는 것은 그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서로 다른 멘도사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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