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책갈피 속 와인 아로마] 황금빛 거품에 가려진 욕망, '나일강의 죽음'과 샴페인

때가 되어 본가에 내려가게 되면 어릴 적 사용하던 방이 시간이 멈춘 듯 그 자리에 있다. 얇게 내려앉은 먼지를 제외하면 기억 속 모든 것이 고스란히 놓여 있다. 방 문 옆으로 들어선 책장에는 눈에 익은 전집이 줄 맞춰 꽂혀 있다. 추리소설에 빠져 있던 시절, 용돈을 한두 푼씩 모아 책장을 채워나갔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을 들여 읽었던 작품들은 추리소설계의 여제라 불리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것이었다.


[출처: 챗GPT 생성 이미지]


1937년에 발표된 <나일강의 죽음(Death on the Nile)>은 20세기 추리문학의 정점이라 평가받는다. 이 작품은 나일강을 운항하는 호화 유람선 카르나크호를 배경으로 상류층 여행객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비극적인 연쇄 살인을 다룬다. 애거사의 작품들에 거듭 등장하며 그녀의 페르소나로 비춰지는 프랑스인 탐정 에르퀼 푸아로(Hercule Poirot)는 작중에서 범인을 색출할 뿐 아니라 인간 본성에 내재된 탐욕이 이끄는 파멸적 말로를 고발한다.


이야기는 미모와 지성, 막대한 유산을 모두 소유한 상속녀 리넷 리지웨이(Linnet Ridgeway)와 그녀의 절친한 친구였던 몰락한 귀족 가문의 재클린 드 벨포르(Jacqueline de Bellefort), 그리고 재클린의 약혼자인 무일푼 청년 사이먼 도일(Simon Doyle)의 관계에서 시작된다. 재클린은 결혼 자금을 마련하고자 리넷에게 사이먼을 소개하지만, 리넷과 사이먼은 급격히 사랑에 빠지며 결혼에 이른다. 배신감에 사로잡힌 재클린은 이집트로 신혼여행을 떠난 도일 부부를 그림자처럼 뒤따르며 집요하게 압박을 가한다. 도일 부부가 재클린의 스토킹으로부터 피신한 카르나크 호에 재클린 역시 승선하며 갈등의 무대는 선상으로 옮겨진다.


“우리에겐 나일강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샴페인이 있어요!”


작품에 묘사된 인간관계의 뒷면에는 자본과 계급 구조에 대한 갈망이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 리넷은 막대한 부를 통해 주변을 지배하는 인물로, 그녀의 오만은 주변인들에게 질투와 열등감을 자극한다. 이러한 리넷의 허영심은 2022년 개봉한 동명의 각색 영화에서 위 대사를 통해 더욱 노골적으로 연출된다. 원작 소설에서는 레드 와인으로 묘사되었던 설정이 영화에서는 상류층의 낭비벽과 쾌락주의를 시각적으로 극대화하기 위해 샴페인으로 치환된 것이다.


이러한 자리를 빛낼 만큼 독보적인 위상을 지닌 샴페인 메종으로 필립 포나(Philipponnat)가 떠오른다. 이 가문은 1522년 아프릴 르 필립포나(Apvril le Philipponnat)가 처음 포도밭을 매입한 이래 500년에 걸쳐 와인을 빚어온 가장 오래된 샹파뉴 메종 중 하나다. 1935년 전설적인 포도밭 끌로 데 고아스(Clos des Goisses)를 인수하여 샹파뉴 최초의 단일 포도밭 샴페인을 출시하며 세계적 명성을 확립했다.


[제공: 롯데칠성음료]


필립 포나, 블랑 드 누아 엑스트라 브뤼(Philipponnat Blanc de Noirs Extra Brut)는 작황이 뛰어난 해에만 생산되는 밀레짐 샴페인이다. 몽타뉴 드 랭스(Montagne de Reims)의 그랑 크뤼 구획과 마른 밸리의 양지바른 프리미에 크뤼 밭에서 수확한 최상급 피노 누아만을 사용하며, 일부는 오크 배럴에서 발효하고 나머지는 스테인리스 탱크에서 숙성한다. 오크 숙성분은 신선한 산미와 뼈대를 제공하고, 스테인리스 탱크 숙성분은 젖산발효를 거쳐 부드러운 질감을 더한다. 노즈에서는 잘 익은 사과의 산뜻한 향과 브리오슈의 고소한 풍미가 피어나며, 입안에서는 피노 누아 샴페인 특유의 힘 있는 골격이 느껴진다. 검은 포도로 빚은 백색 와인이라는 블랑 드 누아의 역설은 마치 사이먼 도일과 리넷 리지웨이의 화려한 결혼이라는 백색 가면 뒤에 숨겨진 어두운 진실을 은유하는 듯하다. 


한편, 유람선의 살롱 안에서 술에 취한 재클린은 사이먼과 격렬한 설전을 벌이다 권총을 꺼내 사이먼의 다리를 쏜다. 현장에 있던 다른 승객들이 흥분 상태에 빠진 재클린을 진정시키고 의사를 부르러 간 사이, 부상당한 사이먼이 홀로 남겨진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리넷은 자신의 침실에서 관자놀이에 총상을 입고 숨진 채 발견된다. 한 명에게는 다리, 또 다른 이에게는 머리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제공: 비티스]


르네 조프루아, 로제 드 세니에 브뤼(René Geoffroy, Rose de Saignée Brut)의 세니에는 '피 흘리게 하다'는 의미가 있다. 샹파뉴 로제 와인의 대다수가 화이트 와인에 소량의 레드 와인을 섞는 아상블라주(Assemblage) 방식으로 생산되는 것과 달리, 르네 조프루아는 정통 침출 방식인 포도 껍질에서 방혈하듯 나오는 붉은 즙을 사용하는 세니에 기법을 고수한다. 기계적 압착 대신 포도 자체의 무게로 인한 즙은 샴페인에 루비빛 색상과 붉은 과실의 원초적 아로마를 부여한다.


샴페인의 모태가 되는 퀴미에르(Cumières) 프리미에 크뤼 포도밭은 샹파뉴 전체에서 가장 일조량이 풍부하고 온난한 미세기후다. 백악질 암반 위에 점토와 모래가 두텁게 형성된 토양 구조는 피노 누아에 산딸기와 석류 같은 생동감 있는 과실미와 실크처럼 보드라운 텍스처를 선사한다. 그날 밤 비극적으로 흩뿌려진 혈흔과 달리 포도가 흘린 피는 언제나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다.


재클린은 밤새 진정제를 맞고 간호사의 감시 아래 있었으며, 사이먼은 다리 골절상으로 거동이 불가능했기에 두 사람 모두에게 확고한 알리바이가 성립된 것처럼 보였다. 푸아로는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했지만 선상의 여러 승객은 각자 은밀한 이해관계와 말하지 못할 비밀을 품고 있어 난항을 겪는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연이은 추가 살인 사건이 발생하며 선상은 혼란과 공포에 휩싸인다.


“팀은 하이볼을 마시고 저는 여러 종류의 탄산수를 마시지만, 선생님은 늘 같은 잔에 와인만을 드시죠.”

“...정말 그렇네요!”


원작에서 프랑스인 에르퀼 푸아로는 식사 시 언제나 전용 잔에 와인을 마시는 엄격한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범인은 푸아로의 이러한 패턴을 파악하여, 범행 당일 저녁 식탁에 놓여 있던 푸아로의 잔에 수면제를 투입한다. 푸아로는 앨러턴 부인과의 대화 중 자신이 평소와 달리 비정상적으로 깊은 잠에 빠졌던 사실을 되짚어보며, 범행이 우발적 살인이 아니라 치밀하게 계획되어 있었다는 점을 발견한다.


푸아로는 파편화된 단서들을 짜맞추며 사건의 전모를 밝혀낸다. 살인의 진범은 바로 사이먼 도일과 재클린 드 벨포르였다. 두 사람의 불화와 파혼, 사이먼과 리넷의 결혼은 모두 리넷의 막대한 재산을 가로채고자 붉은 잉크와 시간차 알리바이 조작을 이용해 꾸민 음모였다. 추가 살인을 저지른 인물 역시 상황을 수습하고 사이먼을 보호하려던 재클린이었다. 모든 범행이 드러나자, 재클린은 숨겨둔 또 다른 권총으로 사이먼을 쏜 뒤 자신 또한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제공: 크리스탈 와인]


라망디에 베르니에, 론지튜드 프리미에 크뤼 블랑 드 블랑 엑스트라 브뤼(Larmandier Bernier, Longitude 1er Cru Blanc de Blancs Extra Brut)는 샴페인이 담긴 푸아로의 잔처럼 타협 없는 진실의 폭로를 표상한다. 경도(經度)를 뜻하는 론지튜드는 남북으로 곧게 뻗은 일직선상의 구획에서 수확된 샤르도네만을 사용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백악질 표층이 지표면 바로 아래 노출되어 있는 이 지역 특유의 토양이 와인에 부여하는 수직적인 맛, 즉 입안을 관통하는 날카로운 산미와 미네랄리티를 떠올리게 한다.


론지튜드는 인간의 개입을 최소화한 양조를 추구한다. 섬세하게 압착한 후 토착 천연 효모만을 사용하여 자발적인 발효를 진행한다. 여과를 거치지 않은 채 1년간 효모 찌꺼기와 함께 숙성되며, 메종 고유의 영구 리저브 와인이 높은 비중으로 블렌딩되어 복합미를 형성한다. 인위적인 당분 보정을 억제하기 위해 도사주는 엑스트라 브뤼로 제어된다. 잔에 따르면 섬세한 기포를 내뿜는 황금색의 액체로부터 레몬 껍질, 흰 꽃, 아몬드, 그리고 테루아를 반영하듯 젖은 석회암의 향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백악질의 칼날 같은 선형성을 드러내는 이 샴페인은 푸아로가 선상에서 마주한 거짓과 기만을 걷어내고 본질적 추론에 도달하는 모습을 닮았다.


[출처: 챗GPT 생성 이미지]


작품 속 승객들이 선상에서 나누는 샴페인은 신혼부부의 결합을 찬미하는 축복과 환희의 도구로 등장한다. 그러나 어떤 잔 속에는 마치 누군가를 무력화하는 수면제가 녹아 있듯, 샴페인의 화려한 거품과 감미로운 향기가 인간 내면에 도사린 추악한 욕망을 가리는 위장의 도구로도 작동한다. 작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는 “샴페인 없는 쾌락은 순전히 인위적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삶의 매순간이 예술이어야 한다며, 일상의 억압에서 벗어난 탐미적인 즐거움을 옹호했다. 이를 위해서는 샴페인을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허공을 향해 치켜올리는 샴페인 잔이 어떤 역할을 할지 정하는 것은 개인의 몫이다. 우리가 마실 샴페인이 언제나 황금빛으로 빛나길 기원한다.


프로필이미지김태형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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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26.08.21 08:30수정 2026.08.21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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