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트에서 장을 볼 때마다 스스로도 신기한 두 얼굴을 발견하곤 한다. 온라인으로 주문할 때의 나는 지극히 절제된 사람이다. 장바구니에는 늘 사던 것들만 담고, 총액은 좀처럼 크게 불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직접 매장에 발을 들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계획에 없던 물건들이 하나둘 카트에 실리고, 계산대 앞에 설 무렵이면 예상보다 훨씬 두툼해진 영수증을 받아 들게 된다. 처음에는 이것을 그저 나의 충동이 부족한 탓이라 여겼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두 얼굴은 나의 의지가 아니라 정보가 흐르는 방식이 만들어 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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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화면이 내게 가장 먼저 보여 주는 것은 언제나 '내가 지난번에 산 것들'이다. 화면은 친절하게도 나의 구매 이력을 기억했다가, 다음에 접속하면 그 익숙한 물건들을 맨 앞줄에 진열해 준다. 편리하기 그지없다. 다만 그 편리함의 대가로, 나는 늘 사던 것만 사는 사람이 되어 간다. 화면 너머에 얼마나 다양한 물건이 있는지 나는 좀처럼 알 길이 없다. 반대로 매장의 통로를 걸을 때 나의 눈은 좋든 싫든 수천 가지 물건을 스쳐 지난다. 사려던 것 옆에 놓인 낯선 것에 손이 가고, 시식 코너의 향에 이끌려 장바구니가 무거워진다. 지출은 늘지만, 그만큼 나의 식탁에는 새로운 것이 오른다.
어느 쪽이 옳다고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온라인의 절제에는 낭비를 막아 주는 미덕이 있고, 오프라인의 방만함에는 뜻밖의 발견이라는 선물이 있다. 일장일단인 셈이다. 다만 내가 여기서 눈여겨보고 싶은 것은 지출의 많고 적음이 아니다. 그보다는 '무엇이 내 선택의 폭을 정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온라인에서 나의 선택지는 알고리즘이 미리 골라 준 것들로 좁혀져 있었고, 나는 그 좁아진 울타리 안에서 자유롭게 고른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렇게 개인 맞춤형 알고리즘이 만들어 내는 정보의 울타리를 '필터 버블'이라 부른다. 스스로 선택한다고 여기지만 실은 알고리즘이 깔아 둔 길을 따라 걷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 더 서늘한 생각에 이르게 된다. 온라인 소비는 분명 나의 지갑을 아껴 준다. 그러나 그 절약의 이면에서, 내가 세상을 판단하는 재료가 되는 정보의 샘 자체가 마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매장의 통로가 수천 가지 물건을 눈앞에 펼쳐 놓는 풍요로운 정보원이라면, 나의 이력만을 되비추는 화면은 이미 몇 방울로 졸아든 고갈된 샘에 가깝다. 돈은 덜 쓰되, 그 대가로 나는 점점 더 좁은 우물에서 길어 올린 물로 세상을 그리게 된다. 문제는 이 좁아진 정보가 그저 선택지를 줄이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나의 머릿속에 편향을 심는다.
우리의 뇌는 본래 새로운 정보를 대할 때 기존의 신념과 맞는 것은 쉽게 받아들이고 어긋나는 것은 밀어내는 성향이 있다. 이른바 확증 편향이다. 그런데 알고리즘은 바로 이 성향을 먹이로 삼는다. 내가 좋아할 만한 것만 골라 끊임없이 되먹이니, 나의 기존 취향은 반박당할 기회 없이 자꾸만 두꺼워진다. 늘 마시던 품종만 추천받다 보면 어느새 '와인이란 본디 이런 맛'이라는 좁은 확신이 자리를 잡고, 그 바깥의 드넓은 세계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게 된다. 정보가 빈약해질수록 확신은 오히려 단단해지는 이 역설이야말로, 편향이 우리를 길들이는 가장 은밀한 방식이다. 그리고 편향이란, 개인의 취향 문제로 그치지 않고 우리가 세상을 얼마나 넓게 볼 수 있느냐를 좌우하기에, 마땅히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와인 시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와인만큼 정보의 편향에 출렁여 온 것도 드물기 때문이다. 어느 유명한 프로그램에 한 병이 등장하면, 다음 날 그 와인은 온 매장에서 품절이 된다. 어느 배우가 만든다더라, 어느 셀러브리티가 즐긴다더라 하는 소문이 돌면, 그 이름표를 단 와인이 우르르 시장에 밀려 나왔다가 유행이 식으면 이내 자취를 감춘다. 나는 이런 풍경을 여러 해 지켜보았다. 병 안의 액체는 그대로인데, 그 병에 씌워진 이야기가 값과 인기를 좌우하는 광경을 말이다.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아마도 십수 년 전의 일일 것이다. 일본에서 건너온 한 편의 만화가 이 땅에 와인 열풍을 일으켰다. 세계적으로 천만 부 넘게 팔린 그 작품이 소개한 와인들은 가격이 치솟았고, 작중에 등장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백 종이 넘는 와인의 가격이 껑충 뛰었다. 만화 한 편이 한 나라의 와인 소비 지도를 바꿔 놓은 것이다. 물론 그 작품은 많은 이를 와인의 세계로 이끈 훌륭한 입문서였고, 그 공로를 낮게 볼 생각은 없다. 다만 짚고 싶은 것은 그때 그 와인들을 사들인 사람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이가 자신의 혀로 그 맛을 판단하고 골랐을까 하는 점이다. 상당수는 '만화에 나온 와인'이라는 이야기를 산 것이지, 와인을 산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흥미로운 것은 이 편향이 값싼 와인에만 해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랑 크뤼 같은 최고급 와인의 세계야말로 이야기의 힘이 가장 강하게 작동하는 곳이다. 어느 평론가가 백 점을 줬다는 소문, 어느 유명 인사의 셀러에 잠들어 있다는 풍문, 몇 병 남지 않았다는 희소성의 서사가 그 와인의 값을 실제 맛과는 별개의 궤도로 밀어 올린다. 값이 비쌀수록 우리는 그 값을 정당화해 줄 이야기에 더 목마르고, 그 목마름이 다시 값을 떠받친다. 저가의 유행이든 고가의 명성이든, 그 뿌리는 결국 하나다. 남이 정해 준 정보에 나의 선택을 맡기는 태도 말이다.
나는 이것이 비단 와인만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트에서의 나의 두 얼굴이 그러하듯, 우리 일상의 소비 전체가 정보의 편향 위에서 출렁이고 있다. 화면이 권하는 것을 사고, 순위에 오른 것을 보고, 남들이 좋다는 곳으로 몰려간다. 편리하고 안전한 선택이다. 대개는 실패하지 않는다. 다만 그 안전함의 대가로 우리가 잃는 것이 있다. 스스로 판단하는 근육, 곧 자신의 취향이라는 것이다. 늘 사던 것만 사는 사람의 혀가 좀처럼 넓어지지 않듯, 늘 추천받은 것만 마시는 사람의 취향은 좀처럼 깊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주체적인 와인 소비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이 유행을 무조건 등지는 고집이나, 남의 평가를 죄다 무시하는 오만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정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다스리는 것이 핵심이다. 남의 이야기는 참고하되 최종 판단은 나의 혀에 맡기는 것. 백 점짜리라는 평가를 읽었더라도 내 입에 맞지 않으면 담담히 '나에게는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 반대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무명의 한 병이라도 내 마음을 울렸다면 그것을 내가 좋아하는 와인으로 당당히 삼는 것. 주체성이란 결국 자신의 감각을 신뢰하는 용기에서 나온다.
이 용기를 기르는 방법은 간단하다. 마트의 통로를 걷듯, 이따금 알고리즘의 울타리 밖으로 걸어 나가 보는 것이다. 화면이 권하는 익숙한 이름 대신 처음 들어 보는 산지의 와인을 한 병 골라 보고, 순위표에 없는 품종을 일부러 찾아 마셔 보는 것. 그렇게 낯선 것과 부딪치는 횟수가 쌓일수록, 우리는 남의 지도가 아니라 자신의 지도를 그리게 된다. 실패도 있을 것이다. 기대에 못 미치는 병도 만날 것이다. 그러나 그 실패조차 온전히 나의 것이기에, 그 과정에서 배운 것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추천으로 인한 백 번의 성공보다, 스스로 고른 한 번의 실패가 취향을 더 단단하게 만든다. 2004년 즈음인가 나는 당시 패밀리마트에 진열된 스무 가지도 되지 않는 와인으로 고민한 적이 있다. 그리고 결국 하나씩 다 사서 마셔봤다. 그때의 시도들이 지금의 나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
추천의 시대는 우리에게 선택의 수고를 덜어주었다.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그 수고를 덜었다는 것은, 고르는 기쁨과 고르는 힘까지 함께 덜어냈다는 뜻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지갑을 아끼는 사이 우리의 머릿속에는 알게 모르게 편향이 쌓여 간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고르는 기쁨과 힘, 그리고 넓게 보는 눈만큼은 남의 손에 넘기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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