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9월 셋째 금요일은 그르나슈 데이(International Grenache Day)다. 그르나슈를 보다 널리 알리기 위해 만들어진 날로, 올해는 9월 18일이다. 그르나슈는 세계 여러 와인 산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품종이지만 다른 품종과 블렌딩되는 경우가 많아 자신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우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이번 그르나슈 데이를 맞아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그르나슈의 다양한 얼굴을 알아보자.

[출처: 챗GPT 생성 이미지]
그르나슈, 가르나차 그리고 카노나우
프랑스에서는 그르나슈(Grenache), 스페인어로는 가르나차(Garnacha), 이탈리아 사르데냐(Sardegna)에서는 카노나우(Cannonau)라는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지만 이들은 모두 같은 품종이다.
그렇다면 그르나슈의 고향은 어디일까? 스페인 북동부 아라곤(Aragón)이 유력한 기원지로 거론되지만 사르데냐를 둘러싼 논의도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유전적으로 같은 품종이라는 사실은 확인됐지만 정확히 어디에서 처음 생겨났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확답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이다.
분명한 것은 그르나슈가 오랜 시간 지중해 곳곳으로 퍼져 나가 각 지역에 깊이 뿌리내렸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스페인의 아라곤과 카탈루냐(Catalonia), 프랑스 남부 론(Rhône)과 루시용(Roussillon), 이탈리아 사르데냐를 비롯해 호주와 미국 등 신세계까지 그 무대가 넓게 펼쳐져 있다.

[남호주 바로사 밸리의 그르나슈 빈야드, 사진: Shutterstock]
산지에 따라 바뀌는 얼굴
그르나슈는 따뜻하고 건조한 환경에 잘 적응한다. 잘 익은 붉은 과실을 중심으로 향신료와 허브를 연상시키는 풍미를 보이며, 충분히 익으면 높은 당도로 인해 알코올과 볼륨감이 풍부한 와인이 된다. 반면 색은 생각보다 짙지 않고 타닌도 지나치게 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런 그르나슈의 다양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 스페인이다. 특히 아라곤은 가르나차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지역으로, 캄포 데 보르하(Campo de Borja), 칼라타유드(Calatayud), 카리녜나(Cariñena) 등에서 오랫동안 중요한 품종으로 자리해왔다.
동쪽의 카탈루냐 프리오랏(Priorat)에서는 가르나차가 카리냥(Carignan) 등과 어우러져 힘 있고 농축된 와인으로 만들어진다. 프리오랏의 척박한 리코레야(llicorella) 토양과 오래된 포도나무가 만들어내는 깊이는 가르나차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 마드리드 인근 시에라 데 그레도스(Sierra de Gredos)에서는 스타일이 달라진다. 높은 고도와 화강암 토양, 오래된 가르나차 포도나무를 바탕으로 향과 신선함, 섬세한 질감을 강조하는 생산자들이 등장하면서 '가르나차는 뜨겁고 무거운 와인을 만든다'는 기존의 인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프랑스 남부 론에서는 그르나슈가 샤토뇌프 뒤 파프(Châteauneuf-du-Pape), 지공다스(Gigondas), 바케라스(Vacqueyras), 코트 뒤 론(Côtes du Rhône) 등을 대표하는 핵심 품종으로 자리한다. 또한, 지구 반대편 호주로 넘어가면 바로사 밸리와 맥라렌 베일에는 19세기에 심은 그르나슈 포도나무들이 지금도 남아 있어, 최근에는 이를 활용한 올드 바인 단일 품종 와인들이 새로운 관심을 받고 있다.

[그르나슈 포도, 사진: Shutterstock]
블렌딩의 조연에서 당당한 주연으로
그르나슈가 오랫동안 중요한 품종으로 평가받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뛰어난 블렌딩 능력이다. 특히 남부 론에서는 그르나슈 누아(Grenache Noir)가 시라(Syrah), 무르베드르(Mourvèdre), 카리냥(Carignan), 생소(Cinsault) 등과 어우러져 레드와 로제 와인으로 만들어진다. 대표적인 것이 그르나슈, 시라, 무르베드르를 조합한 이른바 'GSM 블렌드'다.
그르나슈가 풍부한 과실과 볼륨을 담당한다면 시라는 색과 향신료, 구조감을 더하고 무르베드르는 단단한 골격과 깊이를 보탠다. 서로 다른 품종의 장점을 결합해 균형과 복합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르나슈에게는 이것이 역설이기도 했다. 너무나 훌륭한 블렌딩 품종이었기에 와인의 이름 뒤에 숨어 정작 품종 자체가 가려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분위기가 달라졌다. 오래된 포도나무와 특정 포도밭의 개성을 강조하고, 과도한 추출과 농축보다는 신선함과 섬세함을 추구하면서 그르나슈 자체의 매력을 보여주는 와인이 주목받고 있다. 스페인의 그레도스와 호주의 맥라렌 베일은 이러한 흐름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블렌딩의 든든한 조연으로 유명했던 그르나슈가 이제 자신의 이름을 전면에 내건 주인공으로 당당하게 각광받게 된 것이다.
그르나슈의 또 다른 색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르나슈는 정확히 말해 그르나슈 누아(Grenache Noir)다. 하지만 그르나슈에는 청포도인 그르나슈 블랑(Grenache Blanc)과 분홍빛 또는 회색빛 껍질을 가진 그르나슈 그리(Grenache Gris)도 존재한다.
그르나슈 블랑은 그르나슈 누아와 유전적으로 같은 프로필을 가지며 포도알 색깔에 영향을 미치는 체세포 돌연변이로 구별된다. 스페인에서는 가르나차 블랑카(Garnacha Blanca)라고 부른다. 그르나슈 블랑은 남부 론에서 중요한 화이트 품종으로, 클레렛(Clairette), 루산(Roussanne), 마르산(Marsanne), 비오니에(Viognier) 등과 함께 블렌딩된다. 대체로 과실 풍미가 풍성하고, 둥근 질감을 지녀 화이트 블렌드에 볼륨을 더하는 역할을 한다.
그르나슈 그리 역시 그르나슈 누아의 색 변이로, 익으면 포도 껍질이 회색을 띤 분홍빛으로 변한다. 그르나슈 블랑보다 재배 면적이 훨씬 적으며, 과실감과 둥근 질감을 지닌 비교적 낮은 산도의 와인을 만들어 화이트부터 로제까지 다양한 스타일에 활용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르나슈 로제에는 적포도인 그르나슈 누아가 훨씬 널리 사용된다. 남부 프랑스의 타벨(Tavel)을 비롯해 지중해 곳곳에서 그르나슈 누아는 로제 와인의 주요 품종으로 쓰인다.
그르나슈의 변신은 단순히 색에서 끝나지 않는다. 프랑스 루시용의 바뉠스(Banyuls), 모리(Maury), 리브잘트(Rivesaltes) 등에서 그르나슈는 주정강화 와인인 뱅 두 나튀렐(Vin Doux Naturel, 이하 VDN)의 중요한 품종으로 사용된다. 이렇듯 그르나슈라는 하나의 품종군에서 드라이 레드와 화이트, 로제부터 달콤한 주정강화 와인까지 만날 수 있다.
오랫동안 그르나슈의 장점은 다른 품종과 잘 어울린다는 데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새롭게 발견하고 있는 것은 그르나슈 그 자체의 다양성이다. 9월 18일, 그르나슈 데이를 맞아 이날만큼은 익숙한 와인 한 병 대신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했던 그르나슈의 다른 얼굴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레드만 알고 있었다면, 아직 그르나슈를 절반밖에 몰랐던 것일 수 있으니 말이다.
와인으로 만나는 그르나슈의 일곱 가지 얼굴
산지와 색, 양조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그르나슈. 아라곤의 가르나차부터 그레도스의 섬세한 스타일, 남부 론의 블렌드와 가르나차 블랑카, 로제, VDN, 그리고 호주의 올드 바인까지 그르나슈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일곱 가지 와인을 소개한다.

[제공: 한산더블유앤비]
아라고니아 셀렉시온 에스페시알 Aragonia Seleccion Especial
스페인 아라곤의 대표적인 가르나차 산지 캄포 데 보르하에서 가르나차 100%로 만든 레드 와인이다. 잘 익은 체리와 블랙베리 같은 농밀한 과실에 향신료와 토스트, 오크에서 비롯된 풍미가 겹쳐진다. 풍부한 과실과 볼륨감, 부드럽게 이어지는 타닌을 통해 따뜻하고 건조한 환경에서 충분히 익은 가르나차의 전형적인 매력을 경험할 수 있다. 스페인 아라곤의 얼굴을 보여주는 와인이다.

[제공: 베리타스트레이딩]
라스 모라다스, 센다 Las Moradas, Senda
마드리드 서쪽 시에라 데 그레도스의 산 마르틴 데 발데이글레시아스(San Martín de Valdeiglesias)에서 가르나차 100%로 만든 와인이다. 높은 고도와 화강암 토양, 오래된 포도나무는 최근 그레도스 가르나차가 주목받는 중요한 배경이다. 라즈베리와 체리 같은 붉은 과실에 꽃과 허브, 후추와 시나몬을 연상시키는 향이 섬세하게 겹치며, 농축미보다는 신선함과 우아한 질감이 돋보인다. 힘과 농축미만을 앞세우기보다 신선함과 섬세함을 보여준다.

[제공: 신세계엘앤비]
이 기갈, 지공다스 E. Guigal, Gigondas
남부 론의 대표 산지 지공다스에서 그르나슈를 중심으로 무르베드르와 시라를 블렌딩해 만든 와인이다. 잘 익은 붉고 검은 과실과 후추를 비롯한 향신료, 허브의 풍미가 어우러지고 탄탄한 구조와 풍부한 질감이 뒤따른다. 그르나슈만 사용한 단일 품종 와인과는 또 다른 그르나슈의 장점을 경험할 수 있으며, 오랫동안 남부 론 블렌드의 중심을 지켜온 그르나슈의 역할을 잘 보여주는 와인이다.

[제공: 레뱅]
보데가스 까레, 사라고사 플로레스 Bodegas Care, Zaragoza Florece
스페인 아라곤에서 가르나차 블랑카(Garnacha Blanca)로 만든 화이트 와인이다. 국내에서는 아직 상대적으로 생소하지만, 스페인과 프랑스 남부에서 오랫동안 화이트 와인에 사용돼 왔다. 흰 꽃과 시트러스, 흰 과육의 과실을 연상시키는 향에 부드럽고 풍성한 질감이 어우러지며, 가르나차 블랑카 특유의 볼륨감도 느낄 수 있다. 그르나슈를 레드 품종으로만 알고 있었다면 특히나 흥미로운 와인이 될 것이다.

[제공: 나라셀라]
르 쁘띠 꼬쇼네 그르나슈 로제 Le Petit Cochonnet Grenache Rosé
프랑스 남부 랑그독 루시용에서 그르나슈 100%로 만든 드라이 로제다. 적포도인 그르나슈 누아를 사용하지만 침용 시간을 조절해 옅고 투명한 핑크빛과 산뜻한 과실 풍미를 얻는다. 딸기와 라즈베리 같은 붉은 베리의 향을 중심으로 가볍고 신선한 질감이 이어져 편안하게 즐길 수 있다. 같은 그르나슈 누아라도 양조 방식에 따라 농밀한 레드에서 산뜻한 로제까지 전혀 다른 스타일로 표현될 수 있음을 보여주며, 그르나슈 로제가 반드시 블렌드일 필요가 없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제공: 더블유에스통상]
샤또 롱보, 리브잘트 앙브레 Château Rombeau, Rivesaltes Ambré
프랑스 루시용의 리브잘트에서 그르나슈를 중심으로 마카베오를 블렌딩해 만든 주정강화 와인으로, 앙브레(Ambré)는 산화 숙성을 통해 호박색과 말린 과일, 견과류 등의 복합적인 풍미를 발달시킨 리브잘트의 VDN 스타일이다. 오렌지와 견과류를 연상시키는 풍미와 단맛, 높은 알코올이 어우러져 풍성한 질감을 형성한다. 드라이 와인을 넘어 달콤한 주정강화 와인으로 변신하는 그르나슈의 또 다른 모습이다.

[제공: 드바인임포츠]
닉 하셀그로브, 블랙빌리 올드 바인 그르나슈 Nick Haselgrove, Blackbilly Old Vine Grenache
호주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의 맥라렌 베일에서 그르나슈 100%로 만든 와인이다. 수령 100년을 훌쩍 넘긴 올드 부시 바인에서 수확한 포도를 사용해 호주에 남아 있는 오래된 그르나슈 포도밭의 유산을 보여준다. 체리와 라즈베리 같은 붉은 과실에 꽃과 허브, 감초를 연상시키는 풍미가 어우러진다. 스페인과 프랑스를 넘어 그르나슈의 또 다른 중요한 산지로 자리 잡은 호주, 특히 맥라렌 베일의 올드 바인 그르나슈를 경험하기 좋은 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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