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이 이어졌다는 소식을 들으면 와인 애호가에게는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그해 와인은 좋지 않은 것 아닐까?' 하지만 폭염 빈티지는 최고기온 하나만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같은 날 40℃를 기록한 두 포도밭에서도 포도가 실제로 경험한 열은 다를 수 있다. 같은 포도밭 안에서도 오전 햇빛을 받은 송이와 늦은 오후까지 직사광선을 받은 송이가 다르고, 충분한 물을 공급받은 포도나무와 수분 스트레스를 받은 포도나무의 상황도 다르다.
그래서 폭염 빈티지를 이해하려면 '얼마나 더웠는가'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한다. 포도나무가 그 더위를 어떻게 경험했고, 재배자는 어떻게 대응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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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온 40℃와 포도알 40℃는 다르다
기상관측소가 기록하는 기온과 포도알의 온도는 다르다. 햇빛에 직접 노출된 포도알은 태양 복사 에너지를 흡수하기 때문이다. 연구에 따르면 직사광선을 받는 포도알 표면은 주변 공기보다 12~15℃까지 높아질 수 있다. 따라서 기온이 35℃라고 해서 포도알도 35℃인 것은 아니다. 잎 밖으로 완전히 노출된 포도알은 훨씬 높은 온도에 도달할 수 있는 반면, 잎이 그늘을 만들어주는 송이는 같은 포도밭에서도 전혀 다른 온도를 경험한다. 바람과 습도, 포도알의 색과 송이의 치밀도 역시 과실 온도에 영향을 준다. 결국 폭염의 영향을 이해할 때는 최고기온뿐 아니라 과실 표면온도(fruit surface temperature)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온도 차이는 포도알의 일소(sunburn) 피해와도 연결된다.
포도나무에도 '에어컨'이 있다
포도나무도 스스로 몸을 식힌다. 핵심은 증산(transpiration)이다. 뿌리에서 흡수한 물이 잎까지 이동해 기공을 통해 수증기로 빠져나갈 때 증발 과정에서 열을 빼앗아간다. 사람이 땀을 흘리면서 체온을 낮추는 것과 비슷하다. 문제는 폭염과 가뭄이 함께 찾아올 때다. 토양에 충분한 물이 없다면 포도나무는 수분 손실을 줄이기 위해 기공을 닫는다. 이는 수분을 보존하기 위한 반응이지만 대가가 따른다. 증산에 의한 냉각이 줄어 잎의 온도가 올라가고, 동시에 이산화탄소 흡수도 감소해 광합성이 제한된다. 'Australian Wine Research Institute(AWRI)'는 극단적인 폭염에서 기공이 닫힌 잎의 온도가 주변 기온보다 최대 10℃, 노출된 포도알은 최대 15℃ 높아질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폭염 속 포도나무는 물을 아끼는 것과 몸을 식히는 것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
포도밭의 방향까지 중요한 이유
포도밭의 열 방향(row orientation)도 중요하다. 남북 방향으로 포도나무 열을 만든 포도밭을 생각해보자. 동쪽 면은 비교적 서늘한 오전에 햇빛을 받지만 서쪽 면은 하루 중 기온이 가장 높은 오후에 직사광선을 받는다. 일조량은 양쪽에 비교적 고르게 분배될 수 있어도 포도알이 경험하는 온도는 같지 않다. 메를로(Merlot)를 대상으로 한 한 연구에서는 서쪽을 향한 포도알이 35℃ 이상에서 평균 70.5시간을 보낸 반면 동쪽 송이는 5.4시간에 불과했다. 40℃ 이상에서는 서쪽이 2.7시간, 동쪽은 0시간이었다. 일소(sunburn)도 서쪽 송이에서 관찰됐다. 포도밭의 방향은 단순히 햇빛을 얼마나 받느냐만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루 중 언제 햇빛을 받느냐도 결정한다. 그렇다고 더운 지역에서는 무조건 동서 방향으로 포도나무를 심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위도와 경사, 수형, 바람, 태양의 궤적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중요한 것은 포도밭의 방향을 이제 일조량뿐 아니라 열 노출의 시간표로도 볼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포도알도 햇볕에 탄다
강한 햇빛과 높은 온도가 겹치면 포도알에도 일소(sunburn)가 발생한다. 높은 과실 표면온도와 강한 가시광선, 자외선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산화 스트레스와 세포 손상을 일으킨다. 심해지면 과피에 갈색이나 괴사 반점이 생기고 포도알 전체가 쪼그라들기도 한다. 여기서도 단순히 '몇 도 이상이면 포도가 탄다'고 말하기 어렵다. 품종과 생육 단계, 햇빛에 미리 적응했는지, 노출 시간과 수분 상태 등에 따라 반응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특히 갑작스러운 노출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동안 잎 아래에서 자라던 송이 주변의 잎을 한꺼번에 제거하면 포도알은 충분히 적응하지 못한 상태에서 강한 직사광선을 받는다. 그래서 평소에는 통풍과 병해 관리에 도움이 되는 잎제거(leaf removal)도 폭염 직전에는 오히려 위험한 작업이 될 수 있다.
언제 더웠는지도 중요하다
폭염의 강도만큼 중요한 것이 발생 시기다. 개화 무렵의 폭염과 숙성기의 폭염은 포도나무에 같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특히 베레종을 전후해 포도알의 생리와 성분 변화가 빠르게 진행된다. 이 시기의 고온은 과실 조성과 최종 와인 품질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다만 '베레종 이후가 무조건 열에 더 약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연구에 따라 포도알의 열 손상 임계온도와 생육 단계의 관계가 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 대신 실제 포도밭에서 베레종과 숙성기의 고온이 중요한 이유는 포도알의 당·산·색·향이 빠르게 변하는 시기와 겹치기 때문이다. 결국 폭염 빈티지를 볼 때는 얼마나 더웠는가와 함께 언제 더웠는가를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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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도가 높다'와 '잘 익었다'는 같은 말이 아니다
이 부분은 와인을 마시는 사람에게 특히 중요하다. 고온에서는 포도의 당 축적이 빨라질 수 있고, 산, 특히 말산의 감소도 촉진될 수 있다. 그런데 포도의 모든 성분이 같은 속도로 성숙하는 것은 아니다. 당도는 충분히 높아졌지만 향 성분이나 타닌을 비롯한 페놀 성숙은 생산자가 원하는 수준에 도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반대로 조금 더 기다리면 산은 계속 떨어지고 잠재 알코올은 더 높아질 수 있다. 심한 열과 수분 스트레스가 이어져 포도알이 탈수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포도알에서 물이 줄어들면서 당이 농축돼 측정 당도가 올라갈 수도 있다. 이 역시 포도나무가 정상적으로 광합성을 이어가며 당을 축적한 것과는 다른 현상이다. 따라서 폭염 빈티지에서는 '당도 상승 = 완전한 성숙'이라는 공식에 더욱 주의할 필요가 있다. 생산자가 수확 시점을 결정하기 어려워지는 이유다.
더우면 레드 와인의 색도 더 진해질까?
이 역시 단순하지 않다. 충분한 열은 포도의 성숙에 필요하지만 지나친 고온은 적포도 품종의 안토시아닌(anthocyanin) 축적과 안정성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연구에서는 30℃를 넘어가는 높은 온도에서 안토시아닌 합성이 억제되거나 분해가 촉진되는 현상이 관찰됐다. 다만 품종에 따른 차이도 크다. 따라서 더운 해 → 더 잘 익은 포도 → 더 짙은 레드 와인이라는 단순한 공식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폭염이 심한 해에는 당과 산, 색과 향, 타닌이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다. 결국 생산자의 목표는 어느 하나의 숫자를 최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성숙의 속도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는 것이다.
폭염이 온다면, 당장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폭염이 며칠 뒤 찾아온다고 해서 새로운 포도밭을 만들 수는 없다. 그래서 단기 대응의 핵심은 물과 그늘, 냉각이다. AWRI는 폭염이 예보되면 며칠 전부터 근권에 충분한 수분을 확보해 포도나무가 증산에 의한 냉각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할 것을 권한다. 캐노피도 중요한 보호막이다. 특히 오후 햇빛을 강하게 받는 쪽은 잎을 충분히 남겨 송이를 보호하고, 폭염 직전에는 과도한 잎 제거(leaf removal)나 트리밍(trimming)를 피하는 것이 좋다. 필요하면 차광망을 이용하거나 오버헤드 스프링클러 등의 냉각 방법을 고려할 수도 있다.
조금 독특한 방법도 있다.
포도나무에 '선크림'을 바르는 것이다
카올린(kaolin) 같은 흰색 미세 광물 입자를 잎과 포도알 표면에 얇게 입히는 입자 피막(particle film)은 태양 복사의 일부를 반사해 조직이 흡수하는 에너지를 줄인다. 연구에서는 카올린 처리 후 잎과 포도알 온도가 낮아지는 결과가 보고돼 왔다. 폭염이 오기 직전의 대응을 압축하면 결국 이렇다. 물을 확보하고, 필요한 그늘을 남기고, 필요하면 직접 식힌다.
폭염이 일상이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하지만 폭염이 드문 이상기후가 아니라 반복되는 조건이 된다면 매번 응급처치만 할 수는 없다. 포도밭 자체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먼저 포도밭의 위치와 고도가 중요해진다. 더 높은 곳이나 바람이 잘 통하는 곳, 과도한 오후 일사를 피할 수 있는 위치의 가치가 달라질 수 있다. 열 방향과 수형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포도밭을 조성한다면 연간 총 일조량뿐 아니라 가장 뜨거운 시간에 송이가 얼마나 노출되는지도 설계 요소가 된다. 기존 포도밭에서는 캐노피 구조를 바꾸는 방법도 있다. 목표는 무조건 많은 그늘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광합성과 통풍을 유지하면서 가장 위험한 시간대의 직사광선을 줄이는 것이다. 토양과 물 관리 역시 장기 전략이다. 토양의 구조와 유기물을 개선해 수분을 저장할 능력을 높이고, 필요하다면 관수 방법도 더 정밀하게 바꿀 수 있다. 지표 작물(Ground cover)나 피복재(mulch)는 토양 표면의 열과 반사 복사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건조한 지역에서는 포도나무와의 수분 경쟁도 고려해야 한다. 더 장기적으로는 대목과 품종이라는 선택지가 있다. 가뭄에 대한 적응력이 다른 대목을 선택하고, 매우 뜨거워진 지역에서는 발아와 숙성 시기, 수분 이용 특성이 다른 품종을 검토할 수도 있다. 즉 단기 대응이 물 → 그늘 → 냉각이라면 장기 적응은 위치 → 방향 → 수형 → 토양과 물 → 대목 → 품종까지 확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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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소비자는 폭염 빈티지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폭염이 심했던 해는 나쁜 빈티지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평소 충분한 숙성이 어려운 서늘한 산지에서는 따뜻한 해가 오히려 좋은 성숙을 가져올 수 있다. 반대로 이미 따뜻한 지역에서는 극단적인 고온과 가뭄이 균형을 깨뜨릴 수 있다. 무엇보다 같은 지역에서도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충분한 수분을 확보한 포도밭과 그렇지 못한 포도밭, 오후 직사광선으로부터 송이를 보호한 포도밭과 과도하게 노출된 포도밭, 수확 시점을 정확하게 판단한 생산자와 그렇지 못한 생산자의 결과는 같지 않다.
그래서 소비자가 폭염 빈티지를 볼 때는 '더웠다 → 나쁘다'라는 결론보다 몇 가지 질문을 먼저 던져볼 필요가 있다. 언제 더웠는가. 가뭄도 함께 왔는가. 포도밭은 그 열에 얼마나 노출됐는가. 생산자는 물과 캐노피를 어떻게 관리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언제 수확했는가.
와인을 마실 때도 같은 질문을 이어갈 수 있다. 알코올은 높지만 산도가 살아 있는가. 과실은 충분히 익었지만 지나친 잼이나 말린 과일 풍미로 치우치지는 않았는가. 타닌은 성숙했는가. 향에는 신선함이 남아 있는가. 결국 폭염 빈티지는 기상청의 최고기온 하나로 설명되지 않는다.
기후가 극단적으로 변할수록 빈티지는 날씨만의 기록이 아니다. 그 날씨에 생산자가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함께 기록한 결과다. 과거 좋은 포도밭을 설명할 때는 흔히 얼마나 좋은 햇빛을 받는지를 이야기했다. 앞으로는 질문이 조금 달라질지도 모른다.
이 포도밭은 햇빛을 얼마나 잘 받는가가 아니라, 햇빛을 얼마나 잘 다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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