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9월 11일 저녁, 더그랜드 롯데 서울 피에르 가니에르에는 피니노 와인과 함께하는 디너 자리가 마련됐다. 테이블 건너편에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패션 명가의 장손 살바토레 페라가모(Salvatore Ferragamo)가 앉아 있었다. 그는 구두도 가방도 아닌 몬탈치노 와인 한 잔을 들어 보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살바토레 페라가모는 패션 브랜드를 창업한 할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았지만, 가업은 쌍둥이 동생 제임스가 이어받았다. 그는 다른 길을 택했다. KPMG에서 회계와 컨설팅 경력을 쌓고 뉴욕대 스턴스쿨에서 MBA를 마친 뒤, 1998년 토스카나 발다르노의 작은 중세 마을 일 보로(Il Borro)를 복원하는 일에 뛰어든 것이다. 일 보로는 오랜 세월 여러 귀족 가문의 소유를 거친 유서 깊은 곳이다.

[아버지 페루치오 페라가모와 아들 살바토레 페라가모, 사진제공: 피니노]
“패션은 아버지의 세계였습니다. 저는 그분의 발자국을 따라 걷기보다 제 것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와인이었습니다. 시즌과 트렌드마다 바뀌는 패션과 달리 땅, 인내, 시간에 뿌리를 내린 것이 바로 와인이니까요.” 살바토레 페라가모가 지난 9월 9일 서울에서 열린 세계지식포럼에서 한 말이다. 그는 일 보로에서 “패션의 컬렉션과는 또 다른, 빈티지로 평가받는 창조성”을 발견했다고 했다. 30여 년에 걸친 복원 끝에 현재 일 보로는 연간 약 25만 병을 40여 개국에 수출하는 와이너리로 성장했다. 그리고 2024년 7월, 페라가모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Brunello di Montalcino)의 역사적인 와이너리, 피니노(Pinino)를 인수한 것이다.
12곳의 후보, 5년의 숙고
“왜 피니노였습니까?” 라는 기자의 질문에 페라가모는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는 이탈리아 와인 중에서도 세계 최고의 수준입니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몬탈치노 진출을 검토하며 숙고한 시간은 무려 5년. 살펴본 후보지가 12곳에 이르고 그 와인들을 모두 블라인드 테이스팅한 결과 피니노의 품질이 압도적이었다고 한다. 여기에 실용적인 이유도 더해졌다. 피니노의 포도밭은 고도가 높아 기후변화가 가속화되는 지금, 장기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갖췄다고 판단한 것이다.
피니노의 역사는 변호사이자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의 선구자였던 티토 코스탄티(Tito Costanti)가 포도밭과 와이너리 건설을 위해 부지를 사들인 18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피니노는 1950년 브루넬로 생산자 명단에 등록된 초기 와이너리 중 하나가 됐고, 코스탄티는 브루넬로의 위상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했다. 페라가모가 이 땅과 와이너리를 인수한 것은 2024년 7월. 설립 후 정확히 15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피니노라는 이름의 유래는 소박하다. 이탈리아어로 '작은 소나무'라는 뜻인데, 와이너리로 이어지는 진입로에 늘어선 작은 소나무들과 포도밭이 있는 몬토솔리(Montosoli) 마을 인근에 자리한 소나무 숲에서 따온 이름이다.
일 보로와 피니노, 두 와이너리가 서로 협업하는지, 아니면 독립적으로 운영하는지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페라가모의 답은 간단했다. 양조팀은 일 보로와 피니노에 각각 존재하지만, 두 곳 모두 수석 와인메이커인 스테파노 키오촐리(Stefano Chioccioli)가 감독하고 있다는 것. 2011년부터 페라가모와 함께 일해 온 키오촐리의 경험과 노하우가 피니노에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구조다.
A Real Breakthrough
피니노의 21헥타르 부지 중 16.2헥타르를 차지하는 포도밭은 몬탈치노 북쪽의 두 지역에 나뉘어 있다. 하나는 북쪽 몬토솔리 인근의 '피니노' 구역으로 자갈이 많고 배수가 좋은 석회질과 이회토를 갖춘 곳이고, 다른 하나는 북동쪽의 '칸키(Canchi)' 구역으로 점토가 많아 폭염에도 수분 보유력이 탁월하다. “각기 다른 특징을 가진 두 곳의 밭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라고 페라가모는 설명했다. 참고로 칸키는 카사노바 디 네리와, 피니노는 체르바이아와 마루네토 등 몬탈치노의 유명 와이너리들과 인접해 있다.
16.2 헥타르의 포도밭 중 7.67헥타르는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를, 5.42헥타르는 로쏘 디 몬탈치노(Rosso di Montalcino)를, 3.15헥타르는 산탄티모(Sant'Antimo DOC)를 생산하고, 기르는 품종은 산지오베제 그로소(Sangiovese Grosso)가 유일하다. 주목할 것은 1980년에 식재된 피니노의 한 구역(3.5헥타르)으로, 이곳의 고목에서 수확한 포도로는 비냐 피니노(Vigna Pinino)라는 싱글 빈야드 와인을 만든다.

[피니노 포도밭과 와이너리, 사진제공: 피니노]
“몬탈치노 시내 북쪽 끝에서 내려다보면 저희 밭이 바로 보입니다. 이곳은 과거에 몬탈치노 사람들이 좋은 산지오베제를 생산하기 위해 가장 먼저 선택한 자리 중 하나입니다”라고 말하며 페라가모는 152년 된 이 작은 구획이 바로 피니노가 시작된 곳이라고 강조했다. 인수 이후 지속 가능성을 위한 실천도 이어지고 있다. 포도나무 사이에 녹비 작물을 심어 토양에 영양을 공급하는 그린 매뉴어(green manure), 페로몬을 이용한 해충 교미교란, 화학 제초제 없이 기계로 잡초를 관리하는 방식 등이 핵심이다.
페라가모가 피니노를 인수한 뒤 가장 먼저 바꾼 것은 오크와 코르크였다. 오크통은 약 3분의 1을 새것으로 교체했다. 병마다 품질이 고르지 못했던 원인이 코르크라고 판단한 그는 코르크 전량을 최고급품으로 바꿨다. 라벨에도 솔방울 문양을 새겼다. “이탈리아에서는 솔방울이 아주 좋은 상징이에요. 장수, 강인함, 다산, 근성과 연결되죠”라고 그는 설명했다.
그는 블렌딩에도 참여했다. 2024년 7월 인수 당시 아직 병입 전이었던 2019년과 2020년 두 빈티지의 블렌딩에 직접 관여한 것이다. “생산 철학은 전통을 지키는 클래식 스타일의 브루넬로입니다. 다만 우리가 인수한 뒤 손댄 것들이 있죠. 저희가 추구하는 높은 품질 기준에 미달하는 와인은 모두 걷어내고 최상급 배럴에서 숙성된 것만 선별해 완성했습니다.” 2020년 빈티지는 “이전 빈티지들에 비해 진정한 도약(a real breakthrough)”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피니노의 네 가지 스타일
이날 디너 자리에 오른 와인은 네 가지였다. 로쏘 디 몬탈치노 2022는 신선한 붉은 베리류의 향이 향긋하면서도 풍성하게 올라온다. 은은한 바닐라 향이 더해져 부드러움을 완성하고, 질감은 매끈하며 산미는 산뜻하다. 살짝 스치는 민트 향과 함께 주시(juicy)한 스타일이 부드러운 타닌에 싸여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이어진다. 페라가모는 “로쏘는 브루넬로와 같은 포도, 같은 테루아에서 나왔지만 셀러에서 보내는 시간이 짧을 뿐입니다. 베이비 브루넬로라고 할 수 있죠”라고 소개하며, 2022년이 무척 더웠던 빈티지여서 와인의 산도를 지켜내는 데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고 짚었다.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 2020가 이어졌다. “2020년은 다들 기억하시겠지만 팬데믹의 해였습니다. 하지만 그게 긍정적으로 작용한 면도 있었습니다. 다른 일에 관여할 틈 없이 와이너리에만 머물며 포도와 와인을 완벽하게 관리할 수 있었으니까요.” 다만 수확기 중반에 비가 내려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 특유의 파워는 덜하지만 대신 우아함이 강조된 와인이 됐다는 게 페라가모의 설명이다. 검은 베리류의 향과 향신료 향이 훌륭한 조화를 이루고, 스모키한 뉘앙스와 다크 초콜릿, 마른 허브 향이 복합적인 아로마를 구성한다. 묵직한 바디감 속의 매끄럽고 부드러운 타닌이 힘과 깊이감을 동시에 완성한다.

[피니노 와인들, 사진제공: 피니노]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 비냐 피니노 2020는 1980년에 식재된 피니노 밭의 고목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든 와인으로, 연간 생산량이 4,000병에 불과하다. 50%는 대형 오크통, 50%는 토노(tonneau, 500리터 용량)에서 숙성한다. 붉은 베리와 검은 베리 향이 화려하게 어우러지고, 풍미는 부드러우면서도 풍성하다. 매끄러운 타닌이 입안을 기분 좋게 매만지며, 풍성함과 산뜻함 사이의 균형이 탁월하다. “체리, 블랙체리, 레드커런트, 라즈베리 같은 붉은 과실 향이 나무 향에 묻히지 않고 살아 있습니다.” 페라가모의 표현대로, 일반 브루넬로보다 살짝 더 달콤하면서도 벨벳 같은 타닌이 우아하게 균형을 잡는다. “컬렉터와 브루넬로 애호가 모두를 위한 와인입니다.”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 리제르바 2019는 작황이 뛰어난 빈티지에만 출시하는 와인으로, 생산량은 약 1,300병에 불과하다. 오크에서 36개월, 병입 후 추가 숙성을 거친다. 풍미의 집중도가 탁월하고, 아로마와 산미의 밸런스도 뛰어나다. 향신료, 허브, 미네랄 등 아로마가 층층이 쌓이며 복합미를 더하고, 질감은 단단하면서도 매끈해 입안을 전혀 자극하지 않는다. 특유의 묵직함이 선사하는 만족감이 남다르다. “리제르바는 숙성 잠재력이 아주 우수합니다. 최근 1999년산을 마셔 봤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아로마가 발현되더군요.” 페라가모의 말이다.
시음 도중 자연스레 이어진 대화에서 페라가모는 레드 와인의 산도가 갖는 역할을 강조했다. “우리는 흔히 화이트 와인에서만 산도를 말하지만 레드 와인에서도 산도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입안을 깔끔하게 정리해 줄 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게 잔에 다시 손이 가게 만들어 주니까요.” 서빙 온도에 대해서도 의견을 밝혔다. “저는 레드 와인을 권장 온도보다 더 차갑게 16도까지도 내려서 마시는 걸 좋아합니다. 손으로 잔을 감싸면 온도가 금방 올라가 버리거든요.”

[한국을 찾은 살바토레 페라가모 대표, 사진: 김상미]
와인의 헤리티지는 빈티지마다 증명하는 것
와인 잔을 사이에 두고 오간 대화는 헤리티지에 대한 그의 철학으로 이어졌다. “헤리티지는 저절로 상속되는 것이 아니라 책임입니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매 빈티지마다 품질로 그걸 증명해야 합니다.” 프리미엄 와인의 미래에 대해서도 그는 이렇게 내다봤다. “역사적으로 프리미엄 와인은 가격과 명성 그리고 오랜 역사로 정의되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기준은 투명성과 원산지 증명 쪽으로 옮겨 가고 있다고 봅니다. 소비자들은 누가, 얼마나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만들었는지, 그리고 왜 그런 맛이 나는지를 알고 싶어 합니다. 앞으로 프리미엄이라는 말은 전통뿐 아니라 신뢰를 의미하게 될 겁니다.”
150년 전 한 변호사의 손에서 시작된 몬탈치노의 와이너리가 이제 패션이 아닌 와인의 길을 택한 한 남자와 함께 새로운 장을 열고 있다. 잔에 남은 와인에서 꾸준히 피어오르는 아로마처럼, 피니노는 앞으로 우리에게 브루넬로의 더 많은 것을 보여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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