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더위가 꺾이고 서늘한 가을이 찾아오는 9월의 마지막 주, 시원한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오는 한남동 다이닝 공간 오스테리아 에덴에서 보보스 한남의 엄신길 소믈리에를 만났다. 테이블에는 어니언 수프, 각종 파스타와 스테이크와 함께 알레그리니(Allegrini)의 플래그십 와인 팔라쪼 델라 토레(Palazzo della Torre)가 놓였다.

[아이스 버킷에 칠링 중인 알레그리니 팔라쪼 델라 토레, 사진: 김윤석]
잔에 따라 첫 모금을 마신 엄신길 소믈리에는 온도부터 짚었다. 조금만 칠링해 온도를 낮추면 훨씬 맛있겠다는 것이다. 아이스 버킷에서 잠시 칠링한 후 병에서 서늘한 기운이 감돌자 그는 “지금 온도가 딱 좋다”고 했다. 레드 와인이지만 산뜻한 미디엄 풀바디에 타닌 또한 부드럽게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이어 그는 향을 짚었다. “프레시하면서도 아파시멘토 기법을 쓴 말린 포도에서 나오는 초콜릿 향이 살짝 올라오고, 커피나 스파이스 뉘앙스도 있어요.” 붉은 과일 풍미가 싱싱하게 올라온다는 말도 덧붙였다. 아마로네 같은 기질이 분명하지만, 너무 묵직한 스타일은 아니라는 평가다. “아마로네보다 훨씬 마시기 편한 스타일이에요. 은은하고 부드러운 당도 뒤에서 단단하게 받쳐주는 산도의 조화가 기막히게 밸런스를 잡아줍니다. 적당히 묵직하면서도 산도와 타닌, 과실미가 정삼각형을 잘 이루고 있네요.”
현재 보보스 한남에서 와인 애호가들과 깊이 호흡하고 있는 엄신길 소믈리에는 사실 처음부터 와인 애호가는 아니었다. 대학생 때 호기심으로 시작한 펍에서의 바텐더 아르바이트가 7년이나 이어졌고, 대학 졸업 후에는 미국 올랜도 디즈니월드에서 인턴십과 홍콩 워킹 홀리데이도 경험했다.그가 와인과 제대로 인연을 맺은 것은 2015년 홍콩의 대형 바에서 바 슈퍼바이저로 일하던 시절이다. 당시까지 칵테일에 열중하던 그는 마감 후 우연히 마시게 된 저렴한 피노 그리지오(Pinot Grigio) 한 병을 통해 와인의 매력을 깨달았다고 한다. “예전엔 선물 받은 오퍼스 원(Opus One)도 마시다가 뱉어 버린 적이 있다”던 그였지만, “상황과 분위기에 따라 달라지는 와인의 매력에 제대로 사로잡혔다”는 것이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일을 병행하며 와인 공부에 매진했고, 1년 만에 WSET Level 3와 프랑스 와인 전문가 인증(FWS)을 연달아 획득하며 소믈리에의 길로 들어섰다. 손님의 취향을 최우선으로 고려하고, 와인을 더욱 편안하게 즐길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그의 명확한 소신이다.

[보보스 한남 엄신길 소믈리에, 제공: 금양인터내셔날]
그와 함께 마신 알레그리니 팔라쪼 델라 토레는 이탈리아 베네토 발폴리첼라(Valpolicella)의 전통과 알레그리니 가문의 독창적인 양조 혁신이 집약된 와인이다. 코르비나(Corvina), 코르비노네(Corvinone), 론디넬라(Rondinella) 등 베네토 토착 품종을 사용하는데 손으로 두 번에 나눠 수확한다. 약 30%의 포도는 먼저 수확해 건조하고, 나머지 70%는 일반적인 레드 와인용 포도로 나중에 수확한다. 나중에 수확한 포도는 9월에 일반적인 레드 와인처럼 발효하고, 나머지 30%는 12월까지 건조한 뒤 18~22°C의 비교적 낮은 온도에서 발효한다. 포도 건조 기법인 아파시멘토(appassimento)를 부분적으로 활용하는 이중 발효다. 두 와인을 블렌딩해 오크 배럴에서 최소 15개월 숙성하고, 병입 전 2개월간 안정화한 뒤 병에서 최소 7개월 더 숙성해 출시한다.
아파시멘토는 발폴리첼라 최고의 와인 아마로네(Amarone)를 만드는 방식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잘 익은 포도를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서 3~4개월 말려 수분을 30~40%가량 줄인다. 그러면 당분과 타닌, 풍미 성분이 농축돼 밀도 높고 진한 와인을 만들 수 있다. 팔라쪼 델라 토레는 말린 포도를 30%만 사용하니, 말린 포도만 사용하는 아마로네와 다르다. 신선한 포도가 주는 산뜻함과 발랄한 과실미 위에, 말린 포도가 선사하는 깊은 농축미와 유연한 질감을 다층적으로 입혀내는 방식이다.
아파시멘토 방식을 사용해서인지 팔라쪼 델라 토레는 베이비 아마로네(baby Amarone)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엄신길 소믈리에는 이에 대해 명확히 이견을 밝혔다. 단순히 베이비 아마로네라 부르기에는 이 와인이 지닌 신선함과 유연한 질감이 독보적인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베이비 아마로네보다는 '아마로네로 향하는 다리(bridge to Amarone)'라는 표현이 훨씬 더 적합한 것 같다고 했다. 아마로네의 중후함이나 알코올감이 부담스러운 이들에게 아마로네의 세계로 안내하는 가장 친절하고 유용한 가교가 되어 주기 때문이다.
엄신길 소믈리에가 꼽는 팔라쪼 델라 토레의 가장 매력적인 요소는 단연 입안에서 느껴지는 질감이다. 과하게 짓누르는 풀바디 스타일이 아닌, 명확한 임팩트를 주는 견고한 바디감과 입안을 부드럽게 감싸는 둥근 타닌, 그리고 산미가 인상적인 균형을 이룬다. 블라인드로 마시더라도 농축된 맛과 프레시한 신선함이 공존하는 특유의 미감에서 와인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다. 처음에는 검붉은 체리와 자두, 스파이시한 오크 향이 풍성하게 올라오며, 시간이 지나면서 가죽이나 토양 같은 기분 좋은 뉘앙스로 다채롭게 변화한다.

[엄신길 소믈리에, 사진:김윤석]
팔라쪼 델라 토레는 뛰어난 밸런스 덕분에 다양한 음식과 잘 어울린다. 그는 “산뜻한 소스를 곁들인 채끝 스테이크도 좋지만 오리 콩피, 메추리 요리 같은 가금류와도 아주 잘 어울릴 것 같다”고 말했다. 너무 격식을 갖춘 음식만 떠올릴 필요는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가볍게 칠링한 팔라쪼 델라 토레를 옛날 통닭, 바비큐 치킨, 매콤달콤한 양념치킨과 함께 즐기는 캐주얼한 페어링도 추천했다. 팔라쪼 델라 토레의 산뜻한 산미와 부드러운 타닌이 튀기거나 구운 치킨 요리의 기름기를 깔끔하게 잡아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육볶음이나 떡볶이, 떡갈비, 심지어 비빔밥에 이르기까지 살짝 매콤하거나 풍미가 복합적인 음식까지도 커버할 수 있는 넉넉함까지 갖췄다. “밸런스와 구조감이 좋아 안주 없이 와인만 마셔도 좋을 것 같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와인을 처음 접할 때 많은 분이 과한 타닌이나 까다로운 규칙에 부담을 느낍니다. 하지만 팔라쪼 델라 토레는 은은한 과일 풍미와 신선한 산도, 부드러운 질감을 두루 갖추고 있어 복잡한 배경지식 없이도 첫 모금에 직관적인 만족감을 주는 와인입니다.” 격식 있는 다이닝 테이블부터 정겨운 일상의 저녁 상차림까지, 아마로네의 깊은 세계로 안내하는 편안한 다리, 팔라쪼 델라 토레. 오늘 저녁, 좋은 사람들과 잔을 맞대며 이 다리를 건너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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